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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영원사] 깊은 골짝 안개 끝, 눈물 머금은 상사화

등록 2008-01-03 14:58

▲ 지리산 영원사   109명 고승 거쳐간 ‘신령의 고향’

법당 뒷편 노승은 옷자락만 얼핏하고 잠잠

꿈쩍 않는 면벽 참선 ‘무슨 연을 끊는지…’    안개 속에서 활짝 피어 있는 것은 상사화였습니다.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 등 지리산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만수천을 타고 가다가 마천면 삼정산 방향으로 들어가 가파른 외길을 한참 오르니 추적추적 빗방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빗물인 듯 눈물인 듯한 물방울들이 한데 뭉쳐서 뭉게뭉게 안개를 피우는 저편 끝에 영원사는 있었습니다. ‘신령의 고향’이란 뜻의 영원사(靈源寺)를 신비롭게 하듯 영묘한 안개가 두류선원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냈지만 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곳은 역대 109명의 고승이 거쳐간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해인사 말사인 영원사는 원래 신라 진덕여왕때 영원 스님이 창건했다고 합니다. 영원 스님은 원래 부산 금정산 범어사 스님이었는데, 욕심 많아 구렁이로 변해버린 스승을 다시 동자로 태어나게해 제자로 삼은 뒤 기어코 깨달음을 얻게 했다고 합니다.   구렁이가 된 스승 영혼까지 챙겨 기어코 깨닫게

 

 옷깃만 스쳐도 500번의 전생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인연은 무엇이길래 영원 스님은 그 욕심많아 구렁이가 된 스승의 영혼까지 챙겨 기어코 깨달음을 얻게 한 것일까요.

 오늘 이 순간, 또 지금까지 내가 만난 수많은 인연들이 시야에 흐릿하게 스쳐갈 때에 불현듯 법당 뒤편에서 한 노승의 옷자락이 보이는가 싶더니 세인에게 자취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얼른 모습을 감춰버렸습니다. 아마도 더 이상은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류선원이라고 이름붙여진 선원 법당에 들어서니, 한 남자가 벽을 바라본 채 홀로 앉아 좌선하고 있었습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옆도 돌아보지않은 채 그대로 묵연히 참선했습니다. 그는 또 어떤 계기로 세상의 인연을 끊고 이곳에서 저토록 홀로 정진하고 있는 것일까요.

 선원 문을 나서니 안개가 걷힌 영원사의 단아한 정원에선 물기 어린 꽃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화사한 꽃이 있었습니다. 상사화(相思花)였습니다.   불로초 캐러온 중국 처녀, 스님 짝사랑 못 이뤄 요절한 곳에 펴    절집에 상사화라. 절집서 눈물을 머금고 서 있는 상사화를 보니, 애절한 뭔가가 제 마음에 콕 박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상사화는 꽃은 피우지만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또 잎이 말라붙은 뒤에 꽃대가 나와서 꽃이 피므로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그리움만 삭이는 꽃이라고 해서 상사화라고도 부르고 이별초라고도 부릅니다. 그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상사화가 생긴 유래에 대해선 두개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옛날 바다 건너 중국 땅에 딸만 있는 약초 캐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선에 불로초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약초를 캐기 위해 조선에 당도해 전국을 헤매다 결국 죽게 돼 딸에게 후대에라도 불로초를 구해야 한다는 유언을 했답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불로초를 찾아 떠돌던 처녀는 어느 암자에서 고승을 만나 도를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암자에서 수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절에 젊고 잘생긴 스님이 고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 젊은 스님을 보자마자 처녀는 첫눈에 반해 애를 태웠지만 젊은 스님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 지 절을 내려가 버렸습니다. 결국 처녀는 젊은 스님이 간 절로 찾아가 용기를 내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불문에 든 몸으로 여자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스님의 말을 들은 처녀는 그 자리에서 요절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있어 그 곳에서 잎이 없는 꽃이 피고, 꽃이 지고나자 잎이 자라는 것을 본 사람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처녀가 꽃으로 태어난 것이라며 상사화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전설은 스님의 사랑 얘기입니다. 한 스님이 세속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불문에 든 몸으로 맺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절마당에 풀을 심었는데, 이 풀이 스님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말해주듯 풀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풀잎을 보지 못하자 이를 상사화라고 이름했다고 합니다.   성욕에도 하느님이 현존, 잘 인도하면 긍정적

 

 “수천의 생을 반복한다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않다.”

 제가 사랑하는 7~8세기 인도의 고승 샨티데바(적천·寂天)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지금 바로 후회 없이’. 하지만 그 ‘사랑’이 이토록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이토록 자주 애닮프게 합니다.

 자신을, 육체를 초월하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한 수도자들도 사랑과 애착의 포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직 사랑에 목매다는 세인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 상사화

 가톨릭에서 최고 성자의 한분으로 꼽히는 베네딕도 성인(480~?)도 “사랑의 불길에 마음을 태워 없애 버리고 싶을 만큼,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이 불타올랐다”고 고백했습니다. 영적 여정 중에도 성욕은 명백히 표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도는 성욕 같은 우리의 욕구에도 하느님이 현존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그런 걸 감춰서도 안되며 다만 하느님께 다 맡기고 하느님을 지향하라고 했지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현대 가장 존경받다가 지난 1월 94세를 일기로 별세한 피에르 신부도 삶의 가장 강력한 본능 가운데 하나로 성적 욕망을 꼽았지요. 그는 성적 욕망을 아무렇게나 충족시키다 보면 큰 재난을 겪게 되지만 잘 인도한다면 다시 말해서 진실한 관계와 나눔 속에서 실현한다면 그 욕망은 매우 긍정적인것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 정결한 삶을 허원한다고 해서 욕망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면서 자신도 한 순간, 욕망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입센은 “한 사람도 사랑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온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시몬 데스카는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단지 사랑이 없는 곳에만 비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주위엔 상사화의 아픔을 안은 먹먹한 가슴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어떤 아픔 속에서도 누군가 사랑할 때만 볼 수 있는 바로 그것    그래서 옛선사들은 (조건 없는 이타적)사랑과 (이기적) 애착을 구분해 바른 사랑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상대를 소유해 내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탐욕은 상대를 가급적 환상적으로 이상화시키고, 그 이상화가 하나의 허구를 창조해내 우리는 우리가 만든 허구적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티베트의 아티샤 존자는 “우리가 한 사람을 허구와 겹쳐 볼 때, 그 아름다운 허구와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나중에는 그 사람이 변했다고 실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 그 모습, 얼굴, 목소리는 아주 매력적이다. 나는 그것을 가져야 한다.”

 아티샤는 이것이 바로 집착인데, 집착은 하나의 대상 속에서 자기만족을 찾으려는 동기로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관계에 근심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집착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과 집착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나쁜 쪽으로 변했다고 보일 때라고 합니다. 그 사랑이 진짜라면 사랑의 느낌은 더 강해지고, 사랑이 단지 집착이었다면 그 느낌은 물러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영원사를 빙 둘러싼 지리산의 운무들이 다가오더니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인듯 흘러내리는 그 빗방울 속에서도 상사화는 생각과 달리 여전히 웃고 있었습니다. 그 영롱함과 아름다움은 분명히 어떤 아픔 속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무엇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괴테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다’고 했습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 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하늘이 감춘 땅>(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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