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감춘 땅] ‘선의 종가’ 지리산 벽송사
깊은 산에 드넓은 평지…좌-우 살상 상흔도
늘 푸른 미인송 유독 많은 까닭은 또 뭘까
벽송사에 가면 평화가 느껴집니다. 벽송사는 지리산 천왕봉과 연결된 골짜기 중 가장 아름다운 칠선계곡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협량하지 않고 드넓은 산 속 분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리산 일대 사찰 가운데 사하촌에 의존하지 않고 유일하게 절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드넓은 밭 저 건너로 들어선 당호들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한 미인송들이 서 있고, 그 앞엔 대나무 군자들이 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6.25때 빨치산 야전병원…국군 소탕작전에 완전 소실
뒤뜰에 가니 미인송 아래로 부도탑 세기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요즘의 부도탑은 세간의 욕심을 담아 서로 크기를 뽐내고 있지만 벽송사의 옛부도탑들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 불교답고 승(僧)다웠습니다.
하늘과 지리산과 소나무와 대나무와 절과 부도탑과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 이런 평지가 심산에 숨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평화로운 곳이 한 때는 죽고 죽이는 살인과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는 것은 더욱 더 믿기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벽송사는 6.25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이었다고 합니다. 지리산에서 경찰과 군인에게 쫓기고 쫓겨 죽어가던 빨치산들이 죽어가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산에 숨어있는데도 넓고 햇볕도 잘 들고 물도 풍부하고 산수도 좋아서 치료하는 장소로는 그만이어서 이곳을 야전병원으로 택했던 듯합니다. 그 때문에 벽송사는 국군의 빨치산 소탕 작전 때 국군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벽송사는 1960년 복원한 것입니다.
신재효 판소리 ‘가루지기’의 주무대
벽송사엔 이런 살상과 단말마의 신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애욕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평화로운 곳이.
벽송사에 가면 기이한 나무장승들을 볼 수 있습니다. 경내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이라는 목장승이 서 있는데, 남녀 가운데 여자에 해당되는 금호장군은 1969년 난 산불로 인해 머리가 타버려 숯이 되어 코도 떨어져 나가 참담한 꼴로 서 있고, 남자인 호법대장군은 툭 튀어나온 코와 크고 뭉툭한 코, 합죽한 입과 수염 등이 힘깨나 쓰게 생겼더군요.
호법대장군의 모습도 변강쇠를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이 바로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곳이니까요.
신재효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가루지기’(변강쇠 타령)의 주무대가 바로 이곳인 것입니다.
“천하의 오잡년 옹녀가 천하의 변강쇠와 내외 삼아 함양 땅에 살았다. 잡질 외에는 아무 재간 없는 강쇠란 놈 나무 해오라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 뽑아 패어 불을 때고 따뜻한 방에서 옹녀와 놀아나는지라. 원통한 함양 장승신 서울 노량진 나루터의 우두머리 장승 찾아 나섰다. 성이 난 우두머리 장승 팔도에 통문 돌려 수만 장승 새남터에 모이게 하고 강쇠란 놈 응징 방법 강구한다. 결국 8백여 가지 병으로 강쇠에게 병 도배해 죽게 한다.…”
그래서 변강쇠를 지옥에 보내버렸다 하니, 변강쇠와 옹녀나 또 서로 죽고 죽여 지옥고를 받고 있을지 모를 좌·우익들을 어떻게 건져낼 수 있을까요.
불가에선 지옥에서 벗어나 영원히 살 수 있는 길로 견성 해탈의 길을 제시합니다. 벽송사 종무소의 벽에 사공 본정 스님이 지은 ‘견성 해탈의 길’이 적혀 있었습니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데 걸림이 없고
소리 향 맛 감촉이 항상 그대로 삼매로다.
마치 허공을 나는 새가 단지 날아 갈 뿐이듯
취함도 버림도 없고 사랑도 미움도 없네
만약 대하는 곳마다 본래 무심하면
비로소 이름하여 관자재라 부르리라.
도인송
변방의 장수 57살에 입산 득도…휴정·서산대사로 맥 이어져
벽송사는 지금은 이렇게 일반인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절이지만, 선의 종가에 해당하는 절입니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 3월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했습니다. 지엄대사 또한 살생과 전쟁과 죽음을 넘어서려는 서원으로 출가했던 분입니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20살에 무과해 장원급제한 그는 장군이 되어 변방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칼날 아래 사람들이 생목숨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쟁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불도를 닦으려 계룡산,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 등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리산 어딘가에서 수도하고 있다는 도인 법계정심대사를 찾아 57살에 지리산에 입산했다고 합니다. 법계대사는 조선 조정의 불교 탄압을 피해 광점동에서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팔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엄에게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키고 따로 불도는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광주리만 짜던 지엄은 어느날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법계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네 자유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라고 했답니다. 지엄이 스승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가는데 대사가 뒤에서 “지엄아, 너는 도를 받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지엄이 놀라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참회하는 순간 모든 마장이 한순간에 걷히면서 도를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지엄은 살생의 업보와 애착의 욕망까지 벗어버린 모양입니다. 스승은 그에게 곧바로 ‘푸른 소나무’란 뜻의 벽송(碧松)이란 호를 내렸습니다. 그 뒤 3개월만에 스승은 입적하고 벽송에게 70여명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모여듭니다. 벽송의 법은 부용영관 선사에게 이어지고 그 법이 다시 청허 휴정, 즉 서산대사에게 이어져 조선 선의 종주가 되는 것입니다.
법당서 절하는 아이들.
주지 월암, 선승이면서도 베이징대에서 박사학위 따 선-교 겸비
절 앞을 지나는 스님에게 주지 스님이 계신지 여쭤보았습니다. 주지를 맡은 월암 스님은 선승이면서, 베이징대에서 ‘돈오선’(頓悟禪·단박에 깨달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선과 교(학)를 겸한 드문 분입니다. 올 초 조계종 총무원이 주최한 ‘간화선 세미나’에서 그와 함께 발표와 토론을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한국의 선승들에 대해 ‘세상의 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최고의 의사라는 아만만이 가득차 있다’고 가차 없이 비판했을 때 다른 스님들은 거의 눈물까지 흘려가며 항변했지만 그는 이런 비판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훗날 보니 그가 저술한 <간화정로-간화선을 말한다>에서도 선가의 문제점을 냉철히 비판해놓은 것을 보고, 한국 선의 희망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월암 스님은 경주에 가고 안계시다고 했습니다. 다시 경내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으로 안타까움을 달랬습니다.
동국대 불교 대학원장인 법산 스님도 지난해 이곳에서 월암 스님과 함께 정진했다고 합니다. 법산 스님이나 월암 스님 모두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비상했지만 너무도 가난해서 중학교도 진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출가승 가운데도 출가 전 못다 푼 한을 풀 듯이 부와 명예에 매달리는 것을 본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법산 스님이나 월암 스님은 수행자로서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 화평한 기운으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법산 스님은 지난해 안식년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들이 안식년이 되면 외국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이 산중에 와서 수행을 하고, 후학 월암 스님이 선승들을 모아 선과 교를 동시에 가르치는 선회를 여는 기념비적인 일을 하도록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우연히 이곳을 찾은 안국선원 수불 스님이 이토록 중요한 선의 본찰이 신자들이 거의 찾지 않은 채 퇴락하고 있고, 그런데도 주지 월암 스님은 재물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오직 청정 수행승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감격해 20억원을 들여 선방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푸르른 소나무같은 이들을 만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이곳엔 미인송이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미인인가요. 내겐 그 푸르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은지희 조소영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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