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이스라엘, 성서의 현장을 가다] <2>
유대 독립전사 960명 자결로 로마 노예 거부
사해 짠물에 2천년 전 그 ‘정신’ 썩지 않은 듯
[이집트~이스라엘, 성서의 현장을 가다] <1> 모세의 시나이산,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했다 <2> 죽음으로 산 자유의 요새 마사다 <3> 닫혀 죽은 사해와 달리 열려 생명수 된 갈릴리 <4> 3종교 경배-저주가 십자가처럼 엇갈려 평화 통곡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그 죽음마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세계 대제국 로마의 힘과 폭력과 죽음마저 넘어선 ‘인간의 요새’는 살아있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0km. 마사다는 ‘죽음의 바다’ 사해를 바라보고 있다.
마사다(Masada)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과연 사막 가운데 사방이 절벽인 높이 434m 산 위에 궁전이 들어설 수 있는지 산 아래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산 중턱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절벽 위에 올라서야만 이곳이 요새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백척간두처럼 서있는 고지 위엔 무려 620m에 이르는 길이 있을 정도의 평지다. 그러면서 사방이 모두 벼랑인 희한한 지세다.
사방 벼랑인 434m 산 위에 철벽 궁전
이곳을 처음 요새로 만든 것은 대제사장 요나단(기원전 160~143)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귀화인으로서 유대의 왕이 된 헤롯왕(기원전 73~4)은 내부 반란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자 이 요새에 기원전 35년 피신처를 겸한 궁전을 지어 피신했다. 건축가로서도 위대한 건축물들을 지었던 헤롯왕이었던 만큼 그가 거대한 물저장고와 호화판 목욕탕까지 갖춰 지은 궁전은 2천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놀라울 정도다.
유대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헤롯왕이 지은 요새가 로마에 대한 유대인 반란군들의 최후 항전지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사다에서 순례단과 관광객보다 더 많이 눈에 띄는 이들은 이스라엘 군인들과 학생들이다. 이곳은 유대의 승전지가 아니다. 최악의 패배지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이곳을 최고의 순례지로 꼽는 것일까.
역사는 2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은 서기 66~70년 독립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세계의 패자는 반란을 허용치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되고 무려 110만명이 살육을 당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사람의 피가 강을 이뤄 목까지 차올라왔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30여년 전 십자가를 진 채 예루살렘의 골고다언덕을 오르던 자신을 보며 울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며 ‘유대인 최후의 날’을 예고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비극적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던 열심당원들이 쫓기고 쫓겨 최후에 맞선 곳이 마사다였다. 열심당원들의 아내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960여명이었다.
40여년 전 발굴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서기 72년 로마군 실바 장군이 이끄는 9천명의 세계 최강 군인들이 요새를 포위했다. 하지만 절벽 위의 요새는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실바 장군은 지형이 비교적 높은 곳을 택해 200m 높이의 언덕을 쌓아갔다. 그 공사는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6천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맡았다. 그래서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동족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언덕은 완성되고 마사다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열심당원들을 이끌던 유대인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가 최후의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산 채로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면 노예가 될 것이며,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명예롭게 자유인으로 죽을 수 있으며, 이 특권을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채 죽게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없이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먼저 우리의 재물과 요새를 불태웁시다. 그러나 우리의 곡식창고만은 남겨둡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결한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음 결의한 바와 같이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토록 합시다.
산채로 잡힌 청년들이 계속되는 고문에도 생명이 끊어지지않고 고통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남편은 거칠게 다루어지는 자신의 아내를 볼 것입니다. 그는 또 두 손이 묶여서 ‘아빠’하고 소리치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의 손이 자유롭게 칼을 들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하직합시다.”
로마군이 요새에 들어왔을 때 자결한 960명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이스라엘의 ‘계백장군과 5천의 전사들’이었다. 오직 물저장고에 숨어 있던 두여자와 5명의 어린아이들만이 살아 있었다. 유대인 반란군이었다가 로마군에 투항해 불후의 <유대전쟁사>를 남겼던 요세푸스는 이들의 증언을 기초로 최후의 항전기를 썼고, 40여년 전 마사다가 발굴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부각되었다.
전세계 2천만 유대인들의 자존감 상징
예루살렘 히브리대에서 성서학 박사과정을 준비중인 손문수(37) 목사는 “마사다 패전 이후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세상을 떠돌며 1948년에야 이스라엘을 건국한 이스라엘에서 이곳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식을 거행하고, 유대의 젊은이라면 유대인으로서 정신무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라고 전했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찾아와 쓸개를 씹듯 아픔을 씹으며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곳이란다.
이스라엘 내 560만명을 비롯해 전세계에 1400만명의 유대인들의 자존감의 상징인 마사다에서도 유대 회당은 야이르가 최후의 연설을 한 곳이다. 어떤 것도 썩지 않게 하는 짠물뿐인 사해 바닷물에서 생생히 살아 있었던 탓일까.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듯 하다.
“그들이 아무리 산채로 잡으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승리를 그들에게 허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채 죽게 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없이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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