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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불성’ 개벽한 한반도 낭심의 ‘벼랑 동굴’

등록 2008-06-27 17:06

[하늘이 감춘 땅] 부안 개암사 뒤 울금바위 원효방 범도 범접 못한 천길 절벽에 꾸밈없는 ‘선’처럼 우상 ‘싹둑’, 번뇌는 번뇌대로 욕망은 욕망대로
전북 부안으로 향한 날은 한반도 상극, 비극의 날인 6·25였습니다. 상서로운 땅 상서면에선 평지에 바위가 우뚝 솟아 등대마냥 서 있었습니다. 개암사 뒤 울금바위였습니다. '울금'이란 말은 원래 '위용이 있고 크다'는 '위큼'에서 왔다고 합니다. 불(佛)'알'일까요. 가까이 다가가 볼수록 둥그스름한 두 쪽 바위의 형상은 남성의 고환을 닮아보였습니다. 한반도를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으로 볼 때, 변산은 남성의 성기에 해당하고, 울금바위는 바로 낭심이라고 합니다. 원효(元曉·첫새벽)가 울금바위의 천연 굴 속에서 수도한 이래 수많은 수도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새 세상으로의 개벽을 꿈꾸었던 것과 풍수가 무관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화조차 안 받더니 무작정 찾아가니 호탕하게 맞이해
능가산 골짜기에 접어드니 혈색 좋은 사내처럼 발그레한 기운이 넘치는 소나무 사이로 품 넓은 사찰이 두 팔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개암사입니다. 한눈에도 울금바위를 닮은 호방한 사내대장부인 혜오 스님이 호탕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조차 받지 않던 그가 무작정 찾아간 절 마당에서 객을 마주하고 눈빛을 교환한 순간, 전생지기인 듯 맞이해준 것입니다. 그의 방에서 구절초차를 마시면서 마주한 그의 모습은 꾸미지 않고 조작하지 않은 선객다운 기백이었습니다. 선(禪)은 조작하지 않습니다. 선은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허위와 거짓과 꿈을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그러니 어떤 인물을 신비화하거나 우상화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한 인물을 존경하고 싫어하는 것도 우리의 상(相)일 뿐, 그 실체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동시대 인물로 도반이자 불교계 최고의 고승인 원효와 의상은 각각 유명한 러브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원효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 3일간의 사랑을 나눠 현자 설총을 낳았습니다. 의상은 당나라 유학길에서 만난 선묘낭자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겼습니다. 산동반도에 도착한 해동의 선남을 보고 반한 선묘낭자는 의상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의상의 귀국길에 서해에 몸을 던져 용이 된 다음 의상의 호법신장으로서 죽어서도 의상을 도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혜오스님은 "6두품 출신으로 귀족들과 스님들의 노골적인 박대로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원효에겐 공주와의 사랑이 입지를 새롭게 해 불법을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 신라 최고의 귀족인 의상은 당나라에서 선묘낭자와 사랑을 했더라도 당나라 시골 촌부의 딸을 고국에 데려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상식적인 분석이었습니다. 태종의 아들로 출가했던 효령대군이 살았던 태안사 등의 사하촌(절 아래 마을)엔 어김없이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집성촌이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고 스님이 물었습니다.

“번뇌가 바로 생명인데, 번뇌가 없다면 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 왔던 원효와 의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비화와 우상화를, 정작 원효방 아래 사는 그에게선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상을 단칼에 날려버렸습니다. 그는 출가해서 1970년대에 지리산 상무주암, 금대 등 오지 암자에서 참선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 공부심으로 30여년을 지내왔습니다. 개암사에 온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습니다. 출가 뒤 30여년간 수행을 통해 중심을 확고히 잡았다고 자신했지만, 또다시 흔들리는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인간과 도에 완성은 없고 끊임없는 자기혁명이 있을 뿐이며, 원효와 의상도 끝내 자기를 개벽한 한 인간임이 분명하다고 여기는 그입니다. 그는 번뇌가 없는 이의 경지도 인정치 않았습니다. "번뇌가 바로 생명인데, 번뇌가 없다면 산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무생물이 아닌 생물에게 있어서 사고가 없다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번뇌가 즉 보리(깨달음)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식욕, 색욕, 수면욕, 명예욕, 물질욕 가운데 어떤 욕망이 가장 이기기 어렵던가요?" "다 똑같지. 똑같은 무게로 다가올 뿐." 내 질문에 혜오 스님은 "욕망은 다 같은 욕망"이라고 답했습니다. 벼랑 끝 외길 따라 절벽에 매미처럼 붙어서 한발 한발
울금바위로 향하는 그를 따라 그가 기르는 애견 진돗개 두 마리가 앞장섰습니다. 중턱쯤 올라가는데 갑자기 진돗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짓으며 한 나무를 흔듭니다. 그 나무 위를 바라보니 가지 위에 검은 산고양이가 있었습니다. 고양이를 발견한 진돗개가 고양이를 잡아 죽일 심산으로 사납게 나무를 흔든 것입니다. 나무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고양이가 쏜살같이 나무에서 내려와 옆에 있는 더 튼튼한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끈질긴 진돗개에게 잡혀 죽지 않으려고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원효방 아래서도 이런 상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간신히 진돗개를 나무에서 떼어내 다시 울금바위를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넘어선 순간 지상에선 익히 보기 어려운 천길 낭떠러지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23권 <남행일원기>엔 원효방에 왔던 얘기가 적혀 있습니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조심조심 올라갔다.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 마침내 올라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이규보가 말한 나무 사다리는 없었습니다. 이제 한 발 딛기에도 좁은 벼랑 끝 외길에 발을 딛고 절벽에 매미처럼 붙어서 10여 미터를 돌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며 스님은 아예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10년 전엔 한 청년이 울금바위에 왔다가 벼랑을 넘다 비를 만나 한나절 동안 오도 가도 못한 채 절벽에 붙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가 스님과 119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적도 있었답니다. 스님이 어느 날 방에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밖에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뒷산 울금바위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119에 신고를 했고, 119가 출동해보니 한 청년이 낮에 울금바위에 올라갔다가 중간에 부슬비가 내리면서 미끄러워 오도 가도 못하고 한 나절 동안 절벽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바람은 몰아치기 시작했지만 소리쳐봐야 주위엔 인적이 있을 리 없었기에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혜오 스님의 직감력이 아니었다면 청년은 죽은 목숨이었던 것입니다. 

 

야단법석하며 민초와 함께 춤추고 원한과 갈등 어루만져

 

그 울금바위의 절벽을 양손으로 잡으면서 벼랑 끝을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족히 십여 명이 앉을 만큼 넓은 천연 동굴 두 개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동굴 밑은 낭떠러지인데 멀리 산하대지가 눈 아래 펼쳐졌습니다. 원효가 이곳에 온 것은 삼국 통일 이후였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민초들이 원한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더구나 백제 무왕의 왕사였던 묘련스님이 창건한 개암사 위에서 묘련의 제자인 복신이 숨어 백제부흥을 꾀했던 이 동굴에 원효가 온 것입니다. 이 굴 옆엔 능히 수백명이 머물 만한 대규모 굴이 있고, 울금바위 뒤쪽엔 백제부흥군들이 베를 짜 옷을 해 입었다는 베틀굴이 있습니다. 원효는 이곳에서 가끔 저 김제평야로 나가 들판에 단(야단)을 쌓고 법석을 열었습니다. 그 야단법석에서 민초들과 함께 춤추며 원한과 갈등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상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원효방에 내려올 무렵 진돗개 두 마리가 갑자기 사나운 늑대처럼 으르렁댔습니다. 이제는 고양이가 아니라 저들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어찌 적과 싸우고, 나아가 동족끼리 싸우고, 식구끼리 싸우는 게 개들만이겠습니까. 이 단단한 바위도 열립니다. 그래서 개암(開巖·바위가 열림)입니다. 서로 싸우고 죽이는 중생들의 마음은 언제쯤이나 열려 '불알의 씨'(불성·佛性)가 삼라만상에 개화하려나요. 다시 진돗개가 순둥이처럼 뒹굴며 손을 핥았습니다. 어느 것이 이 개의 본심일까요? 부안/글·사진 조현 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하늘이 감춘 땅>(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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