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종가 1080 / 3.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모두 알다
( 본문 )
현사불출령 ( 玄沙不出嶺 ) 하고
보수부도하 ( 保壽不渡河 ) 이나
불출문지천하사 ( 不出門知天下事 ) 라
현사 ( 玄沙 ) 가 고개를 넘은 적이 없고
보수 ( 保壽 ) 는 강을 건넌 적이 없다 .
모두 문 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천하의 일을 알았다 .
무진 ( 無盡 ) 거사 장상영 ( 張商英 1043~1121) 은 사천 ( 四川 쓰촨 ) 성 신진 ( 新津 ) 출신이다 . ‘ 유마경 ’ 을 통해 불가와 인연을 맺은 후 참선수행을 생활화한 송나라 거사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많은 선사들과 교유한 덕분에 선어록 여기저기에 몇가지 당신의 선문답까지 전한다 . 이 선시는 호구소륭 ( 虎丘紹隆 1077~1136) 어록에 기록되어 있다 . 등장하는 인물인 현사사비 (835~908) 와 보수 ( 保壽 = 寶壽 . 풍혈연소 896~973) 선사는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였다 . 그렇다면 그 비결이 무엇일까 ? 이를 신통력이라 고 부른다 .
( 해설 )
각종 문명기기의 발달로 인하여 집 안에만 있어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는 시대다 . 각종 매체가 갖가지 세상 소식을 내 책상 앞에 배달까지 하면서 쏟아내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당사자에게 별로 필요없는 것도 무조건 들이댄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다 . 그래서 잘 골라서 듣고 봐야하는 숙제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 어쨋거나 정보홍수 속에서 나름의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휘둘리지 않는다 .
코로나 19 시대에 인위적 이동제한과 집합금지로 인한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 모이지 않아도 회의가 가능하고 출근하지 않아도 회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 등교하지 않아도 집에서 강의나 수업을 듣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집안에서 집밖 일까지 할 수 있는 세상이다 . 설사 집 밖으로 나가더라도 cctv 와 핸드폰을 연결하면서 집안의 이상유무까지 살필 수 있다 . 이제 집안과 집밖이라는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천안통 ( 天眼通 ) 과 천이통 ( 天耳通 ) 이라는 신통력을 갖추길 꿈궜다 .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 산이나 건물로 막혀 있거나 혹은 거리가 조금만 떨어져도 보고자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 얇은 종이 한 장으로 앞을 가려도 육안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 일타 ( 一陀 1929~1999) 스님은 순천 송광사 삼일암에서 정진할 때 어느 날 사방의 벽이 없어지면서 밖이 훤하게 보이더라는 경험담을 들려 주었다 . 일종의 천안통에 해당된다 .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산길을 걸을 때 밤눈이라도 제대로 밝았으면 좋겠다 . 어두운 빗길 밤운전할 때 길바닥에 그어져 있는 노란선이라도 제대로 보였으면 좋겠다 . 책을 좀 오래 보더라도 눈이 침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왜냐하면 살아가면서 당장 필요한 천안통이 더 아쉽기 때문이다 .
언젠가 고요한 겨울 밤에 눈 쌓이는 소리를 듣고자 귀를 쫑곳 세웠던 일은 내심 천이통 ( 天耳通 ) 을 기대한 까닭이다 . 그 때 ‘ 소리 ’ 란 들리는게 아니라 차라리 보인다고 하는게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전화기와 도청장치는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해준다는 점에서 천이통에 가깝다고 하겠다 . 의사가 사용하는 청진기도 그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 굳이 고전적인 수행방법을 통하지 않더라도 기술문명의 힘을 빌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안통과 천이통을 갖추었다 . 오히려 너무 잘 보이고 잘 들려서 더 문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다 .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고 했던가 .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해결해야 할 숙제는 타심통 ( 他心通 ) 과 숙명통 ( 宿命通 ) 이다 . 타심통은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 사극드라마에서 본 기억이 있는 관심법 ( 觀心法 ) 이 그것이라 하겠다 .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가졌다는 능력이다 . 수사할 때 종종 등장하는 ‘ 거짓말 탐지기 ’ 도 이 영역에 들어간다고 하겠다 .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자칫하면 ‘ 생사람 잡는 ’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
하지만 타심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너 자신을 알라 ’ 는 숙명통 ( 宿命通 ) 이다 . 숙명통은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 인간의 전생과 내생을 논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인지라 언급하지는 않겠다 . 하지만 이를 축소하여 경험적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겠다 . 어제는 나의 과거요 내일은 나의 미래다 . 왜냐하면 어제의 결과가 오늘이요 , 오늘은 또 다시 내일이라는 결과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하루하루 스스로를 살피는 일을 생활화한다면 그것이 바로 실생활 속에서 숙명통을 갖추는 일이 아니겠는가 . 멀리서 찾지말라고 했다 . 밖에서도 찾지말라고 했다 . 숙명통도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불출호신변시방 ( 不出戶身遍十方 ) 하고
불입문상재옥리 ( 不入門常在屋裏 ) 이어다
집을 나가지 않고서도 몸은 온 세상에 두루하고
문에 들지 않고서도 늘 집안에 있는 것처럼 하여지이다 .
글 원철 스님 / 불교사회연구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