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어서 많은 사람의 선망과 존경을 받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것이 없이 박학다식하십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선생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비결은 딱 한가지일세!” 제자들은 몹시 궁금한 듯 이구동성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서 가르쳐주십시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라네.”
문제를 모르면서도 답을 아는 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 곧 얼이 썩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문제를 모르면서 답을 찾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문제는 문제를 모르기에 문제입니다. 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답은 끝이지만 문제는 시작이며, 답은 죽은 것이지만 문제는 치열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 안에 이유가 들어 있고 이유를 알아야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변화의 발걸음은 시작됩니다. 인류의 진보도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었다면 산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전체를 보아야 부분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습니다. 아직도 내 문제가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면, 그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겁니다. 내 안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자기를 살피고(省) 살피는(察) 일이 ‘성찰’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성찰은 자기 약점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기 약점을 알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주 넘어지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약점은 자신을 자주 넘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성찰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알아차리고 나면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데,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치 알이 깨지듯이 자기를 만든 틀이 깨지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 선종의 불서인 <벽암록>에 등장하는 화두 중에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톡톡 하고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깨뜨리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번뇌하는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아대는 것을 성찰이라고 한다면, 밖에서 그 문제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자각하게 하는 것, 곧 알아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아침에 눈을 뜨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허상에서 실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그동안 가장 귀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바뀌게 됩니다.
기독교의 깨달음은 피조물 중심의 가치, 곧 이기적인 가치관이 창조주 중심의 가치, 곧 이타적인 가치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셨는데, 타락한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서만 답을 찾고 있으니 하나님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보는 눈을 현란하게 하는 것이 많은 곳에서는 보는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혹 그때 내 존재를 하나님이 ‘탁’(啄) 하고 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문병하 목사/양주 덕정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