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면서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합니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소월 시인의 <왕십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기다리던 님은 ‘여드레 스무날’ 28일에 왔다가 ‘초하루 삭망’ 1일엔 떠나간다군요. 장마철인 윤5월은 한 달이 29일까지밖에 없으니 님 계실 날은 겨우 3일, 야속도 하여라. 저 비 한 닷새 내려주면 우리 님 이틀은 더 머무실 텐데.
예나 지금이나 남녀 간 사랑 얘기는 늘 애틋도 합니다. 비는 내리다 그치기 마련이고 사랑도 와서는 가버리기 마련이고 사람도 세상에 한번 왔다 가는 가버리기 마련입니다. 용수보살은 <중론> 첫머리에서 ‘오고 감이 없다’하셨지만 우리 같은 필부필부의 눈에는 모든 게 왔다가 가버립니다. 왕십리(往十里)는‘갈 往(왕)’에 ‘十里(십리)’이니 십리를 간다는 뜻이고 왕십리에서 십리를 더 가면 한양 도성입니다. 소월은 십리를 더 가라는 왕십리 지명을 가지고 언어 유희를 합니다. “가도 가도 왕십리.” 가고 또 가도 아직도 십리를 더 가야 왕십리라네요. 그래서 그 십리를 또 더 가보아도 아직도 십리를 더 가야 왕십리. 이렇게 무한 소급하는 ‘왕십리’를 통해 시인은 영원히 도달할 길 없는 사랑의 아스라함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산 위에 걸린 무지개를 잡으러 산 위에 올라갔더니 무지개는 저만치 또 멀어져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닷새를 못 머물고 겨우 삼일 만에 떠나가는 우리 님처럼 내 손에 쉬이 잡히지 않는 게 어디 사랑뿐이던가요. 우리네 꿈이며 욕심도 다 그래요. 백만장자가 되면 천만장자를 좇아가고, 고관대작이 성에 안 차서 대통령을 꿈꾸지만 결국에는 저 자신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기 일쑤입니다.
용수보살이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고(不生不滅·불생불멸), 옴도 없고 감도 없다(不來不去·불래불거)’라고 하신 뜻은 모든 게 서로 기대어 생겨나니(衆因緣生·중인연생), 생멸이나 오고 감의 주체라 할 만한 실체가 따로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만사를 ‘실체’라는 틀을 가지고 봅니다. ‘나’라는 실체가 있고 ‘비’라는 실체가 있고 ‘사랑’이라는 실체가 있고 ‘천국’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여깁니다. 실체란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또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닙니다. 독립과 불변. 대개들 이렇게 생각하고 살지요. ‘나라는 실체는 생전에 하느님 품에 있다가 이 세상에 나오고 죽어서는 하늘나라나 지옥에 간다.’ 혹은 ‘전생에 다른 삶을 살다가 이번 생에 나로 살다가 못된 짓을 하면 뱀으로 태어난다.’
정말 그런가요? ‘실체’의 첫번째 속성인 ‘독립적’인 내가 어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가 만나 비로소 ‘나’라는 삶이 시작된 거고, 내 몸과 마음은 물려받은 부모의 유전자 특성이 그대로 발현된 것일 뿐입니다. 본시부터 부모의 유전자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따로 없습니다. 윤회라는 개념도 그렇습니다. 몸도 다르고 마음도 다른 전생이나 후생의 나가 있다 한들 그 나는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실체의 두번째 속성인 ‘불변’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 뱃속 나는 일단 부모 유전자 특성에 의해 결정이 되지만, 그 뒤 세포분열과 태어나 살아가면서 주위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교육과 환경에 의해 악인이 되기도 하고 선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으면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이 세상과도 안녕입니다. 사람도 그 일부에 불과한 이 세상은 한순간도 쉴 사이 없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나는 어디 따로 없지요.
문제는 ‘개념’, ‘말’이 우리를 속이는 겁니다. 독립적이지도 않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우리 머릿속에서 ‘개념화’되고 그걸 ‘말’로 표현하기는 해야겠기에 우리는 그 사건을 ‘나’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건을 ‘나’라고 개념화하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이 개념과 말은 마치 ‘나’라는 독립적이고 불변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양 우리를 미혹에 빠지게 합니다. 개념과 말은, 변화하고 있는 세상만사를 한순간으로 포착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고정불변의 속성을 지닙니다. 우리가 독립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이 세상만사를 어쩔 수 없이 개념화하고 이름을 붙이지만 그 개념과 이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건이 고정불변의 독립적인 무엇이라는 실체인 양 착각하게 하는 겁니다. 유식 불교에서는 이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부릅니다.
비를 가지고 생각해 볼까요. 소월이 ‘왕십리에 비가 온다’고 노래했는데 이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 ‘비’라는 놈이, 실체가, 구름 속에 숨어 있다가 지금 왕십리에 내려오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데 비라는 실체가 어디 독립적으로 고정불변으로 있어서 구름 속에 있다가 왕십리에 떨어지는 건 아닌 거죠. 수증기가 구름을 만들고 충분한 습도와 온도가 되면 비로소 물방울로 변해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일 뿐. 그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비가 온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나는 이 지구 생명체망이 지닌 거대 유전자 풀에서 부모의 만남을 통해 선택된 일부 유전자의 순간적인 조합일 따름입니다. 내 생각도 내 뇌 신경세포망의 상호작용에서 창발된 산물이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환경의 소산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독립불변이고, 내가 믿는 신조가 독립불변이고, 사랑이나 미움 같은 인간관계가 독립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집착과 고집의 굴레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어떤 상(相)에도 매이지 말라(不取於相·불취어상)고 했습니다. 공자님도 <논어> 자한 편에서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라 하셨으니 “의도, 반드시, 고정된 것, 나라는 이기심”을 없애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내 의도는 이렇다. 이건 반드시 이래야 된다’는 내 주장과 고집에서 비롯합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걸 성서 <창세기>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저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피조물 주제를 잊고 바벨탑을 세우다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나요. 예수님은 뭐라 하셨나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8장34절)고 하셨지요. 나를 버리라 하시니, 나라는 상(相)에 매이지 않는 ‘무아(毋我)’입니다.
지금 저 창밖 감나무 잎새들 위로 쏴 하고 내리는, 그리고 왕십리에도 내리고 있을 저 빗줄기 덕에 우리 님도 며칠 더 머무시려나.
글 김형태 변호사 & <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