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여우숲생명학교 교장.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씨앗 명상 : 그 안에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는 씨앗
달을 보다가 삶의 비밀 하나를 알 수도 있으리라
그믐으로 기울어 사라졌던 달이 다시 차올라 만월(滿月)이 되는 과정을 알아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다시 사위어 그믐, 다시 차올라 보름이 되는 과정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관한 준엄한 진실 하나쯤은 너끈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 달의 차오름과 기움과 다시 차오름의 무한 반복 속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순환과 리듬 위에 놓인 것임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겨울이 봄과 여름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가을과 겨울로 이어지듯, 음울한 날은 희망찬 날로 새 길을 내지만 그 길에 희망이 언제 있었냐는 듯 온갖 회의감 속으로 빠져드는 날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이 인생인 것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처럼 삶이 수많은 모순의 통합 과정으로 점철되는 것임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달의 순환과 그 리듬을 인생에 비추면 인생이 그러한 것임을 알고, 그것을 다시 역사에 비추면 역사 또한 그러할 것임도 알 수 있으리라.
서양과 동아시아의 방법론
서양이 경험적·실증적 방식으로 세계를 규명하려는 전통을 주축으로 했을 때, 동아시아의 전통은 유비추리(類比推理)를 하나의 중요한 방편으로 삼았다. 유비추리, 그러니까 ‘흡사한 사례들에 견주어 궁극의 이치를 헤아리는 방법’은 실증을 따르는 방식보다 정밀한 맛이 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대체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막 바로 육박하는 간결함과 대담함이 있다. 예컨대 밀물과 썰물로부터, 달의 차오름과 기욺으로부터, 확장하여 계절의 순환으로부터 삶의 어떤 근원적 진실을 가늠하는 식이다.
꽃의 생애에서 길어 올린 통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은 간결하다. ‘열흘 붉은 꽃이 없더라’는 이 말은 꽃(자연의 질서와 리듬)으로부터 중요한 단서를 포착한 뒤, 팽창하고자 하는 욕망에 필연적 한계가 있음을 불변의 이치로 제시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그렇게 찾아졌을 것이다.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한 것도 물을 깊게 살핀 뒤 물에 견주어 선(善)의 궁극적 이치를 추상화한 예라 할 수 있다. 깊이 있는 추상의 전통은 불교의 선(禪)적 가르침에서 더 환하게 빛난다. ‘영산회상’의 설법에서 석가모니불이 형언하기 어려운 우주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다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리자, 이에 염화미소로 수긍 화답한 가섭존자와의 일화라든가,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 같은 표현 역시 이런 전통이라 하겠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유학의 전통 역시 우주만물의 근원적 실체와 그 역동 및 운행의 원리를 놀라운 축약을 통해 추상화한다. ‘성’(性)과 ‘리’(理)와 ‘기’(氣), ‘태극(太極)과 음양(陰陽)’과 ‘오행’(五行), ‘상수역학(象數易學)과 의리역학(義理易學)’을 모두 품은 <주역>(周易)의 추상 등이 그 몇 가지 예라 하겠다.
두 전통 중에서 어느 전통이 더 유용할까, 혹은 탁월할까? 오늘날 그 지배력으로 볼 때 두 전통 사이의 우열과 성패는 진작 서구적 방법의 압도적 승리로 판명이 난 듯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위에 간략히 언급한 전통적 관점과 사유는 이제 그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일부 연구자들의 고투만이 있을 뿐, 대중에게서는 그런 전통이 외면받기 시작한 지 오래된 것이 현실이다. 고등학교 이하의 교과 과정에서는 도덕이나 윤리 과목에서 티끌만큼이나 다룰까? 철학과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대학에서는 교양과목에서 핥듯이 다루고 있기는 할까? 이제 그 전통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아주 희미하게 겨우 조금 남아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주로 일본과 미국 중심의 선행(先行)을 따라 형성된 우리의 근현대와, 새롭게 도래한 그 시대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과제였던 현대인에게,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전통적 관점은 수용될 자리를 자연스레 잃고 말았다.
때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이러한 측면은 숲과 관련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왔다. 우리나라에 대학이 들어서고, 그 안에 임학과(산림자원학과, 혹은 산림과학부 등으로 명명)가 생기면서 숲이 서양식 과학을 만났다. 학생들은 모두 생물학이나 산림학, 생리학, 병리학, 생태학 같은 서양 과학의 시선과 방법에 기대어 숲과 생명, 생태계를 바라보고 파악하기 시작했다. 서양 과학은 실로 위대하다. 잘게 나누어 세세히 살피는 서양의 방법론은 규명하려는 대상을 상대적으로 더욱 세밀하면서도 또렷하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제 유전자를, 뇌 속의 특정한 시냅스를 매만질 수 있을 만큼 세밀하고 정밀해졌다. 아마도 세밀함과 명료함이 서양 전통의 최대 강점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서양적 전통은 부분에는 강하지만 전체에는 상대적으로 허약하다. 보이는 것, 실험할 수 있는 것에는 강하지만 숨겨진 것, 실험할 수 없는 것에는 맥을 못 춘다.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유용하지만 통제될 수 없는 변수가 있는 사태에 대해서는 난감해한다.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을 세세히 규명하고, 그 부분 모두를 다시 합치면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라는 서양의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전제는 이러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클 수 있다’라는 전제로 접근하는 우리의 통전주의(holism)적 방식과 결합할 때 비로소 더욱 온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서양의학이 보완통합의학을 모색하는 시도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요컨대 더 온전한 진실은 서양이 지닌 세밀함과 명료함을 살리면서 부분적 구체가 지닌 한계를 발 딛고 넘어서는 지점과, 동양의 전일성을 향한 대담한 추상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전체적 모호가 지닌 한계를 어루만져 극복해내는 지점, 이 양자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만날 수 있는 어느 자리에 늘 숨어있을 것이다. 우주론을 생각해 보자.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서양의 전통은 오랫동안 신의 창조에 기대었다가 눈부시게 과학이 발달한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우주론 모형에 대략 합의하고 있는 듯하다. 대폭발(Big Bang) 이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 누구도 빅뱅 이전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 중국 북송대의 사상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통해 우주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추상화해냈다. 태극도는 우주 만물이 태극의 원리를 따라 형성되고 움직이고 있음을 대담하고 간명하게 그림과 짧은 해설로 추상화한 것이다.
퇴계(退溪),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제일태극도(第一太極圖).
한 톨의 씨앗으로부터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생명성과 근원적 힘을 발견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세밀함과 명료함에 더하여 동양의 대담하고 전일적인 시선이 더해져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로부터 지식을 넘어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양자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씨앗, 종자인가 가늠할 수 없는 우주적 신비인가
우선 씨앗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봄철 숲의 옹달샘 근처에서 흔하게 발견하게 되는 도롱뇽의 알이나, 근처 낙엽 위에 떨어져 있는 한 톨의 도토리에서 나는 빅뱅을 떠올리고 태극의 질서를 사유하곤 한다. 동양적 전통의 대담한 통찰력과 환원주의적 전통의 세밀한 구체성을 정성껏 직조하여 바라볼 때, 하나의 알과 씨앗 한 톨이, 생명이, 그 생명을 살아있게 하고 또 죽게 하는 온갖 다른 환경 요인들이, 각각 그리고 모두 정교하게 뒤얽히며 숲을 우주의 축소판으로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숲이 우주의 작은 전사(傳寫)이듯이 씨앗 역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과학의 렌즈로 보면 씨앗은 매우 구체적인 구조와 기능, 생리적 체제를 갖춘 그 무엇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과학은 씨앗이 지닌 놀라운 신비와 그 가능성, 그리고 신성함을 담아내지 못한다. 과학은 예의 그 나누고 합쳐 전체를 규명해 보려는 태도로 씨앗과 그 발아의 조건을 설명한다. ‘씨앗의 구조는 껍질(종피)과 배젖(배유), 씨눈(배아)으로 되어 있다. 껍질은 씨앗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배젖은 배아가 발아하는 데 필요한 양분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수분과 산소, 온도, 빛 조건이 씨눈의 발아에 가장 중요한 4대 환경 요소라고 과학은 적시한다. 조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씨앗은 작동하지 않고 그저 휴면한다.’ <수목생리학>의 ‘종자 생리’ 부분은 이 요지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오래된 눈으로 씨앗(알)을 보면 더 근원적인 질문에 도전해 볼 수 있다. 내 시선에서 도롱뇽의 알은 일부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빅뱅 직전의 ‘우주 알’(Cosmic egg)과 같다. 또한 씨앗은 무극이면서 태극인 상태를 완벽하게 상징한다. 태극도설의 맨 위에 둥근 원으로 추상화된 바로 그것을 도롱뇽의 알에서, 씨앗에서 상징처럼 확인할 수 있다. 빅뱅 우주론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고 어떻게 팽창과 수축, 다시 팽창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흘러왔는지를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것이 있어야만 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전통에서는 그것을 ‘리’(理)라는 한 음절의 말로 설명한다. ‘理’를 풀어 쓰자면 ‘불사연이연’(不使然而然)이다. (한형조, <왜 조선 유학인가> 등의 저서를 참조) ‘그러라고 시킨 적이 없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理’인 것이다. 그 ‘理’를 주재하는 자리에 행여 무엇이 있다면 거기에 서양의 개념으로는 신(神)을, 우리의 말로는 하늘(天)을 두어도 될 것이다. 서양이 빅뱅 이후 우주의 전개 과정에 대해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태극도설’에서는 태극을 상징하는 원 아래의 그림들로 단순하게 추상해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기(氣)의 작동이 양(陽)과 음(陰)의 동(動)과 정(靜)의 속성을 통해, 오행(五行)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고유의 규칙과 질서를 따르며 전개되는 모습을 간결한 그림으로 추상한 것이다.
씨앗은 우주 생성과 변화 원리를 그대로 품고 있다
조금 어렵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한의학적 전통에서 용어를 빌리자면 씨앗은 ‘원기’(元氣) 그 자체다. 대한한의학회 <표준한의학용어집(2021)>에 의하면 원기(元氣)는 “①생명 활동의 근본이 되는 기운. ②선천(先天)의 천지부모(天地父母)로부터 부여받고 후천(後天)의 수곡에 의해 자양되는 근본 생명력”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씨앗은 천지부모로부터 모든 가능성을 응축해둔 생명의 근원 자리이다. 태극의 운동성을 따라 목화토금수의 기운과 상호작용하면서 조건이 맞으면 자기 껍질을 스스로 열고 팽창과 수축, 팽창을 거듭해 가며 자신의 도(道)를 실현해 갈 힘을 응축해 놓은 원기 덩어리가 바로 씨앗인 것이다. 요컨대 씨앗은 우주 생성과 변화 원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 안에 이미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는 씨앗
그리하여 씨앗은 한 생명의 근원이다. 근원은 그 존재가 펼쳐내고 실현할 가능성의 모든 힘을 이미 담고 있다. 환경 조건이 맞지 않아 여의찮으면 휴면 속에서 몇 개월, 몇 년, 몇십, 몇백 년까지도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진 것이 씨앗이다. 씨앗에는 조건이 맞으면 스스로 껍질을 찢고 새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펼치고 이파리를 돋아 올릴 힘이 이미 접혀 있다. 일단 껍질을 벗고 나오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온갖 결핍 혹은 과잉의 난제를 스스로 풀고 드디어 제 꽃을 피워낼 힘, 마침내 열매를 맺을 힘, 맺은 결실 속의 새로운 씨앗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낼 힘, 그렇게 푸르게 또 푸르게 땅을 물들여 사는 동안 더 큰 우주인 숲의 한 시·공간을 담당할 힘! 이 모든 힘을 이미 가지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씨앗이다. 사람이라는 씨앗 역시 어찌 다르겠는가!
앞서 말한 도토리 한 알을 떠올려 보라. 그 안에는 이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가 담겨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 옆 길가에는 4층짜리 건물보다 높게 자라며 거목이 된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수백 년째 살고 있다. 그 근원은 어디였는가? 여지없이 도토리 한 알이었다. 우리의 주식인 쌀, 그 근원이 되는 볍씨 한 알은 또 어떠한가? 볍씨 한 알에도 벼 한 포기를 완성해낼 가능성이 이미 모두 담겨 있다. 볍씨 한 알은 씨앗 하나가 얼마나 거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그 열매의 개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종자 자체의 특성이나 생육환경, 결실 시기 등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를 수 있지만, 볍씨 한 알은 대략 20~30개 정도의 새로운 볍씨를 맺어낸다.
씨앗은 신성 그 자체
씨앗을 명상하며 바라보기 시작한 이후 나는 모든 씨앗에서 자주 ‘하느님의 입김’(탁동철, <하느님의 입김>에서 빌림)을 느낀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오늘 아침과 점심에 당신은 무엇을 먹었는가?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우리는 단 며칠도 씨앗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아닌가!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이 있어 씨앗이 살고, 씨앗이 제 가능성을 펼쳐냄으로써 또 다른 생명이 산다. 씨앗은 그래서 근본 자리의 연결자다. 우주의 끝없는 팽창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 원소들이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씨앗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함으로써 다양한 생명이 함께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근본 중의 근본이다.
씨앗 속에는 또한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다. 씨앗 자체로도 그러하지만, 씨앗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모든 생명의 과거와 미래 역시 모두 씨앗에 종속된다. 과학의 발견처럼 초기 식물들의 우연한 진화사 속에서 씨앗을 맺는 식물이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모든 씨앗에는 ‘하느님의 입김’이 서려 있다. 나는 이 위대한 연결자에게서 ‘하느님의 입김’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신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영원한 만물의 씨앗이니라.”(7장 10절)
기억하자. 한 톨의 씨앗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우리 모두 한 톨의 씨앗이요, 그 가능성을 품은 존재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씨앗은 아무 곳에서나 발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모든 힘, 원기를 갖춘 것이 씨앗이지만, 씨앗은 아무 곳에서나 발아하지 않는다. 이 또한 우주적 질서를 따라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다. 이제 씨앗을 지배하는 또 다른 우주적 속성을 살펴볼 차례다.
(다음번 글에 이음)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