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까?
여러 해 전 부모님과 동행하여 홍콩 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다. 노인을 모시고 가는 해외 나들이라 약간 염려되는 마음도 들어서, 주역점을 한 번 쳐보았다. 결과는 우연찮게도 여행을 뜻하는 려(旅䷷)괘를 얻었고, 비교적 안정적인 두 번째 자리의 효(爻)를 얻었다. 그 점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그네가 여관에 들어가는데 노자돈을 간직하고, 마음이 곧은 하인 아이를 얻는다. 그러니 끝내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이 점사(占辭)에서 하인 아이는 필자 자신을 가리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만 잘하면 된다는 뜻이로구나” 이렇게 해석하고 길을 떠나 무사히 잘 다녀왔다. 사실 려괘는 그리 편안한 괘가 못된다. ‘려’는 ‘나그네’의 뜻으로, 집에 기거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자리인 이효(二爻)의 점사가 그런대로 무난할 뿐 나머지 효의 점사들은 평탄치 못하거나 상당히 험하다. 그 와중에 용케도 ‘그럭저럭 괜찮은 여행이 되겠다’는 점괘를 얻었으니 신통한 일이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또는 공부 삼아 때때로 주역점을 쳐보고는 하는데, 대체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는다. 그리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서 다시 생각해 보거나 미처 생각지 못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계기를 얻기도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스로도 희한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시초(蓍草: 점을 치는 50개의 가느다란 막대기)를 헤아리거나, 동전을 던지는 행위가 무엇인데 이런 결과를 낳는가?
점을 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무턱대고 권장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때로는 물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답을 얻기도 하고, 더구나 바람직하지 않은 질문으로 점을 치면서 알쏭달쏭한 점사를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어제 산 주식이 오를 것인지, 이 부동산을 매입하면 대박이 날 것인지와 같은 물음은 그리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물을 수 있는 질문이야 매우 다양하고 ‘주역’은 너그럽게 답을 하겠지만, 단순히 일의 성패를 묻기보다는 지금 맞닥뜨린 일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질문이 더 좋다는 생각이다.
시초: 점을 치는 도구인 50개의 막대. 본래 시초라는 풀의 대로 만들었다. 사진 이선경 제공
주역점의 이론 바탕
주역점을 그의 정신분석학에 깊이 적용한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주역점이 주지(主知)적이기 보다는 명상적 지혜를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미숙하고 유치한 사용으로 오용될 여지가 많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주역점의 원리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한 결과, 동시성(synchronocity) 원리라는 이론을 제창했다. 내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누군가를 생각하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온다든지, 어젯밤에 꿈에 보인 분의 부고를 오늘 아침에 받는 경우 등이 그러한 사례로 거론된다. 한마디로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용어로는 이러한 연관성을 ‘감응’(感應)이라고 표현한다. ‘어떤 자극이 일어나면 그것을 느껴서 호응한다’는 뜻이다. 점치는 자와 주역의 원리 사이의 감응이다. 이러한 감응이 가능한 바탕에는 사사로움이 없는 ‘무심함(無思無爲)’ ‘진실함(誠)’이 전제되어 있다. 점이란 우주자연의 원리와 감응하는 것이고, 자연은 참되고 성실하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지속하고 있으니, 점치는 이가 그러한 진실함으로 조언을 구한다면 주역은 시초를 헤아리고 동전을 던지는 행위를 매개로 그 답을 현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점을 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본래 바탕(本性)으로 돌아가도록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점치기는 우리 의식의 심층에서 본래적 자아와 조우하는 명상의 한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만 명상적 앎과 주지적 앎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되어 삶에서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을 ‘주역명상’이라 부르고 싶다. 점괘를 얻는 과정은 신비하지만, 점사를 해석하는 데에는 반성적 성찰과 사색이 필요하며, 그 결론이 삶의 모습으로 결실을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역’점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주역>의 점치기는 태어난 연월일시로 사주팔자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주역>점은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써 주역에게 그 지혜를 구한다. <주역>점의 특별함은 단지 일의 성패를 통보하는데 그치지 않고, 점친 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까를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데 있다. 하나의 사례로 점을 쳐서 건괘(乾卦䷀)의 첫 번째 효를 얻었다고 하자. 점사의 내용은 “물에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潛龍勿用)는 간단한 통보이다.
‘대권 잠룡’이라 하듯이, ‘잠룡’은 유능한 인물이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남들이 알아주는 때를 만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끝내 때를 만나지 못하고 마는 인생도 적지 않다. 평생 ‘잠룡’의 상황만 계속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주역>은 긴긴 조언을 덧붙인다.
‘물에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한 것은 무슨 말인가? ‘잠룡’은 용의 덕을 지니고서 숨어사는 사람이다. 시류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으며, 자신의 명성을 이루고자 하지 않는다. 세상을 피해 살아도 번민하지 않으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다. 뜻을 펴볼 만한 세상(기회)을 만나면 나아가 행하고, 그런 기회를 못 만나면 세상과 어그러진 채로 지낸다. 이러한 뜻이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것이 잠룡이다.
<주역>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음과 인생의 가치는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삶의 가치를 잘 붙들어 지키는 일이 더욱 소중하다고 말한다. 이와 연계하여 <논어>의 첫머리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라 한 문장을 생각한다. 아마도 이는 공자 자신의 이야기였으리라. 나이 70에 이르도록 천하를 돌아다니며 노력했건만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름은 알려져 있었지만 뜻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는 권력자의 대변인이 되는 타협은 하지 않았다. 외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끼던 수제자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안회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통곡하지 않았던가? <주역>과 <논어>의 문장은 이러한 과정을 다 겪은 이의 평범한 듯 비범한 이야기일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생각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나라를 구했건만 돌아오는 보답은 체포와 고문, 백의종군의 명령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다시금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을까? “운명을 탓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함으로써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다.”(<논어>)는 진리관의 구현을 그에게서 본다.
살아가면서 그 누가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으로 내가 이것만큼은 지키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한 가지 있는가? 공자나 충무공과 같이 엄청나게 훌륭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결단하는 그 무엇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것이 내 삶의 등대가 되고 내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을까? <주역>이 단순한 점서가 아니라 ‘마음을 씻는 경전(洗心經)’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렇게 어떠한 경우에도 삶을 긍정하고 가꾸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에피소드 하나
몇 해 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연구소의 소장을 맡게 된 지인의 이야기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들도 있는데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엄격하게 관리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해야 할까, 대체로 타협적인 태도로 나가야 할까? 필자는 주역점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결과는 중부(中孚䷼)괘를 얻었다.
중부(中孚)라는 글자는 가운데 즉 마음속이 미덥다는 뜻을 지닌다. 부(孚)는 어미 새가 알이 잘 부화하도록 노심초사 품어 보호하는 모습으로, 어미가 새끼를 지키는 그런 ‘미더움’을 말한다. 필자는 좋은 괘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힘의 논리로 세상을 판단한다. 엄격하게 대해서 두렵게 만드는 것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모두 힘의 논리의 연장선이다. 그런데 <주역>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진심을 다하라는 것이다. 불안해하지 말고 스스로 믿음을 지니고 정성껏 일하라고 조언한다. 물론 “당신의 미더움이 돼지나 물고기에까지 이를 정도로 정성스러워야 한다”는 조건은 있다. 이렇게 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순진하고 심지어 어리석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자칫 만만해 보이면 시달림을 받는 것이 세상살이 아니던가. 그러나 <주역>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권면하며 “믿음을 지니고 나아가면 하늘도 호응할 것”이라고 격려한다.
‘주역’이 만들어진 이유는
<주역>에는 이 책과 점(占)이 만들어진 목적의 하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성과 천명을 따라 사는 법(順性命之理)’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설괘전>) 또 ‘성인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근심 걱정이 있어서’라고 했다. <주역>의 표현대로는 “백성들의 길흉을 한마음으로 근심했기(吉凶, 與民同患)”(<계사전>) 때문이다.
주역의 사유에서 개체와 세계 전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외부 세계의 이치와 나의 본성에는 모두 천리(天理)가 관통하고 있다. 서로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니 타자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뭇 생명들의 우주적 연대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역(易)의 인식이다. 명상으로서 주역점의 궁극적 목적은 나 자신의 심신의 평안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는(Compassion) 연대의식으로 확장되어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 있다. <주역>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삶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천명을 알아 흔연히 따르기에 근심하지 않는다. 내 삶의 상황을 편안히 받아들여 인(仁)을 돈독하게 행하니, 그래서 참으로 잘 사랑할 수 있다.”(<계사전>)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