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7년 만에 고향에 갔다. 다녀오자 히끄가 ‘온종일 붙어있다가 온종일 떨어져 있으니깐 외로웠다냥!’하는 것 같다.
올 초 시작한 농산물 판매 업무 때문에 블루베리 농장에 있는데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린 조카들이 잘 먹어서 오빠도 항상 주문하던 터라 택배 운송 중에 과육이 깨져서 도착한 줄 알고 전화를 받자마자 “블루베리 깨져서 갔어?”라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큰집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빠의 6남 1녀 형제 중 장남이자 큰 어른이었던 분 그리고 항상 인자하셨던 큰아버지가 아침에 사고로 갑자기 운명했다는 비보였다. 민박 예약이 계속 차 있어서 발인까지 지킬 시간이 안 됐다. 당일로라도 떠나는 분에게 인사를 하려고 비행기 티켓을 알아봤다. 다행히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었다.
새벽 일찍 떠나서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거라 히끄 밥그릇에 저녁 분량까지 수북이 쌓아줬다. 영문을 모르는 히끄는 저녁까지 나누어 먹어야 할 고봉밥을 맛있게 먹었다. 장례식장에 가는 거라 검은 바지와 검은 셔츠를 입었는데 고봉밥에 기분이 좋은 히끄가 자꾸 부비부비해서 집을 나서기 전에 돌돌이로 털을 떼어 내어야만 했다. 떼어 낸다고 했는데 고향에 도착했을 때도 검은 양말에 히끄의 털이 붙어있었다. 이런 이유로 히끄와 함께 살면서 검은색 옷을 안 입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당연히 슬프지만, 다복한 집안의 큰 어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셔서 더 슬픈 장례식이었다. 나는 삼일장 중 이튿날에 도착해서 조금은 안정된 분위기였다. 친척들은 멀리서 온 나의 안부를 묻고 고맙게도 히끄의 안부도 물어줬다. 내 소식은 인터넷과 에스엔에스(SNS)로 잘 보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다는 사촌 오빠는 길고양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외면하고 싶은 흉흉한 뉴스가 많지만 그래도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고향에는 7년 만에 가는 거였고 가족은 5년 만에 만나는 거였다. 민박을 시작하면서 쉬는 날을 따로 챙기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한 달에 하루 쉬는 날을 정하면 고향에 가는 것보다 여행을 가거나 개인 일정을 갖는 게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부모님과의 관계, 정확하게 말하면 자식한테는 최고의 아빠였지만 엄마한테는 최악의 남편이었던 아빠가 미워서 일부러 만남을 피해왔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5년 만에 아빠를 보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부모님의 인생을 마음대로 재단했던 미안함과 나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음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이랄까.
어른들이 흔히 ‘너도 네 자식 낳아봐라’라고 한다. 히끄를 키우다 보니 더욱 아빠를 닮은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빠는 중요한 순간에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캥거루처럼 아빠의 품속에 있었다. 발가락에 티눈이 났을 때 매일 약을 발라준 것도, 사춘기 여드름이 피부병인 줄 알고 피부과에 데려간 것도 아빠였다. 막내의 특권으로 부모님과 함께 잤는데 새벽에 이불을 발로 차면 매일 이불을 덮어주는 것도 아빠였다. 내가 히끄에게 주는 사랑은 아빠가 내게 준 사랑과 비례했다.
고양이 손자 히끄와 잘 놀아줬던 부모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길 잘했다.
태어난 집에서 계속 살아가는 부모님의 인생이 있고, 태어난 집을 떠나 살아가는 내 인생이 있다. 나부터 부모님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부모님이라고 자식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당연하게 이해를 바랐을까.
언니와 오빠는 결혼해서 부모님에게 손녀 손자를 안겨줬다. 부모가 되어보니 그 마음을 알게 되어 그렇게 효도를 하는구나 깨달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어떤 기쁨을 줄 수 있을까. 고양이 손자 히끄와 함께 잘 생각해봐야겠다.
글·사진 이신아 히끄 아부지·<히끄네 집>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