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소하느라고 바쁘지만, 히끄는 평온하다. 고양이는 그래도 된다.
제주에서는 고사리 채취 시기인 4월 중순부터 말까지의 우기를 ‘고사리 장마’라고 한다. 길게는 일주일 동안 짙은 안개와 비가 내려서 영화 <곡성>과 같은 스산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 비를 맞으며 제주 지천에서 고사리가 돋아난다.
고사리 축제가 열릴 만큼 제주 고사리는 유명하다. 옆집 할머니는 일출과 동시에 고사리 꺾으러 중산간에 가신다. 말린 고사리 100g이 1만원에 거래되고 있어서, 시골 부업으로 꽤 쏠쏠하다. 꼭 돈벌이 수단이 아니더라도 아이 손가락처럼 통통한 고사리를 꺾는 재미에 빠져서 잠자려고 눈을 감으면 고사리가 아른거린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이다.
에어컨 청소를 하느라 잠깐 가둬놨더니, 히끄가 ‘나를 잊었냐’는 듯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고사리 장마가 끝나고 맑은 날이 계속되더니 한낮에는 초여름 날씨가 됐다. 히끄도 더운지 바람이 잘 통하는 창문 앞에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러다 곧 에어컨을 켜야 할 것 같아서 에어컨 청소를 예약했다. 시중에 에어컨 세정제가 있지만 냉각핀 깊숙이 청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아무리 인체에 무해한 제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어서 고압 스팀으로만 세척한다는 업체를 찾았다. 집에 아이가 있으니 약품은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한번 더 당부했다. 히끄와 함께 살면서 방향제와 향초 사용도 자제하고, 성분을 알 수 없으면 사용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이 사는 집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있는 집과 같다. 아이는 한참 호기심이 많아서 서랍을 열다가 손가락이 끼기도, 가구 모서리에 부딪히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부모는 서랍 잠금장치와 모서리 보호대를 쓴다.
고사리 장마가 끝나고 미세먼지 없는 5월의 맑은 하늘을 히끄도 좋아하는 모양이다.
고양이는 발소리가 없고 민첩해 사람이 움직임을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 아이와 마찬가지로 대처해야 한다. ‘고양이님’을 안전하게 모셔야 할 의무가 있는 ‘집사 인간’은 앞을 내다보고 문제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에어컨 청소하는 날, 청소 업체 직원이 집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틈에 히끄가 나갈 수 있어서 에어컨이 없는 방에 잠시 가뒀다. 평소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해도 들어가더니 그날은 계속 꺼내 달라고 야옹거렸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계절이 바뀌면 히끄는 털갈이만 하면 되지만, 나는 에어컨 청소를 시작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모기가 많은 시골이라서 심장사상충 예방약을 잠자는 히끄 목 뒤에 발라줬다. 축축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눈을 껌뻑거리고는 다시 잠이 든다. 분명히 에어컨 청소하는 날까지 더웠는데, 그 다음 날부터 쌀쌀해졌다. 선풍기를 넣고 전기장판을 다시 꺼냈다.
매년 속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올해도 날씨에 속았다. 청기 백기 게임도 아니고, ‘반팔 빼고, 긴팔 넣어. 전기장판 넣지 말고, 선풍기 넣어’가 반복된다.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 모든 압축팩이 풀려있어서 히끄는 들어갔다 나왔다 옷에 털을 묻히며 신나게 논다. 덕분에 나는 할 일이 또 생겼지만, 히끄가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신아 히끄아부지 <히끄네집>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