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여왕벌 애벌레가 자라는 방(왕대)을 자른 모습. 애벌레가 풍부하게 공급된 로열젤리 속에 잠겨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로열젤리는 똑같은 꿀벌의 알이 여왕벌로 태어나느냐 일벌이 되느냐를 좌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벌레 유아식에 든 무언가 특별한 성분이 여왕벌을 탄생케 한다는 것이다.
로열젤리에 관한 이런 통념을 무너뜨리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여왕벌의 탄생은 로열젤리의 질이 아닌 얼마나 많이 먹느냐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줄리아 보우셔 미국 노스 다코다 주립대 생물학자 등 미국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왕립학회보 비’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먹이의 양이 꿀벌 여왕벌의 발달에 차지하는 역할을 처음으로 비교 실험한 결과 기존 이론과 달리 여왕벌로 자라는 데는 먹이의 질이 아니라 양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알에서 깬 꿀벌 유충을 돌보는 젊은 꿀벌은 인두선에서 분비한 끈적끈적한 우윳빛 분비물을 애벌레에게 먹이는데, 이것이 로열젤리이다. 처음 사흘 동안은 로열젤리를 나중에 여왕벌, 수벌, 일벌로 자랄 모든 애벌레에게 먹이지만 이후에는 여왕벌 애벌레에게 집중적으로 제공한다.
여왕벌은 일벌과 똑같은 유전자를 지녔지만, 로열젤리를 듬뿍 먹고 자란 여왕벌만이 난소가 발달해 번식하고 수명도 일벌보다 40배나 길다. 로열젤리의 어떤 성분이 이런 특별한 효능을 낳는지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아직 똑 부러진 결론이 나오지는 않고 있다.
꿀벌은 꽃가루, 꽃꿀 등을 섭취한 뒤 로열젤리로 만들어 여왕벌은 물론 다른 애벌레에도 제공한다. 여왕벌 애벌레에게는 특별히 많이 공급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꿀벌을 뺀 다른 많은 벌에서 먹이의 양이 여왕벌을 결정하는 점에 주목했다. 뒤영벌, 말벌, 케이프꿀벌 등은 먹이를 늘리면 유충호르몬 분비가 늘어 생식능력의 발달이 촉진된다.
꿀벌에서도 비슷한 일이 나타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자들은 실험실에서 먹이의 질을 9가지로 달리하고 양을 8가지로 구별한 모두 72종의 먹이를 꿀벌 애벌레에게 먹여 여왕벌의 형질이 얼마나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한 집단에는 먹이를 먹을 수 있는 만큼 양껏 제공했다.
실험 결과 먹이를 많이 공급한 애벌레일수록 여왕벌의 형질이 많이 나타났다. 로열젤리의 함량 등 먹이의 질과는 무관했다. 마음껏 먹도록 한 애벌레 20마리에는 중간 등급의 먹이를 제공했는데도 20마리 모두 상업적으로 기른 여왕벌의 형질을 보였다. 가장 적은 양의 먹이를 준 애벌레는 먹이의 질이 좋아도 여왕벌로 자란 개체가 없었다.
먹이의 양이 중요하다는 건 현장 관찰에서도 드러난다. 연구자들은 “양육 꿀벌은 애벌레가 자라는 기간 일벌보다는 여왕벌 애벌레에 많은 먹이를 준다”며 “여왕벌을 갑자기 키워내야 할 비상상황에서 양육 꿀벌이 여왕벌 애벌레가 들어있는 방의 크기를 늘리는 것도 먹이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로 보인다”고 밝혔다.
물론 먹이의 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단백질이 적은 먹이를 준 애벌레의 사망률이 높았다. 연구자들은 “양질의 먹이는 애벌레의 성장과 발달, 생존에 중요하다”며 “그러나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함량이 꿀벌의 계급을 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라고 논문에 적었다.
벌통 육아방에서 자라는 다양한 발생 단계의 꿀벌들. 뿌연 액체가 로열젤리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로열젤리는 단백질 12%, 탄수화물 27%, 수분 56%와 미량의 지방산, 무기물, 항생물질, 비타민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번 연구는 로열젤리의 특별한 성분이 여왕벌 탄생에 직접 기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로열젤리에 든 미량물질이 동물의 알츠하이머병 치료, 여성 갱년기 증상 치료, 혈관 확장, 콜라겐 생성 등에 기여한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로열젤리의 의학적 효과는 아직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010년 로열젤리를 건강기능식품 원료에서 제외했다. 건강증진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다.
인용 저널:
Proceedings of Royal Society B, DOI: 10.1098/rspb.2020.0614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