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같은 두족류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국 정부가 동물복지법을 개정해 두족류를 보호 대상으로 포함했다. 언스플래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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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문어와 게를 ‘지각 있는 존재’로 인정한 동물복지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영국 의회는 지난 9일 보도자료를 내어 “지각 있는 존재에 관한 동물복지법 개정안이 상원에서 의결됐다. 여왕의 승인을 거쳐 내년 시행된다.”고 밝혔다. ‘지각 있는 존재’(sentient beings)란 고통과 슬픔, 즐거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생명체를 말한다. 쾌고감수(快苦感受) 능력을 갖춘 이런 종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동물 보호’의 대상이 된다.
새 동물복지법에 따라 내년부터 영국 정부는 동물이 ‘지각 있는 존재’임을 고려해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해야 한다. 또한, 전문가로 구성된 동물지각위원회(Animal Sentience Commitee)가 이를 바탕으로 정부 각 부처의 동물복지 정책을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크리스 슈르드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RSPCA) 대표는 “이번 법 개정은 동물이 감정과 느낌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받고 강력한 법적 보호를 받게 된 이정표”라고 밝혔다.
우리는 왜 동물을 보호할까? 동물에게 될 수 있는 한 고통을 주지 않는 게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서다. 근대 이후 동물복지 관련 법과 제도는 ‘고통의 최소화’를 위해 발전했다.
하지만 ‘어떤 동물이 고통을 느끼나?’를 두고선 의견이 분분했다. 개와 고양이가 고통을 느끼는 건 분명해 보이지만, 그럼 물고기와 문어, 바닷가재는 어떨까? 과거에는 물고기 뇌에 신피질이 없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최근엔 행동학적 증거가 쌓이면서 물고기를 고통을 느끼는 지각 있는 존재로 보는 게 학계의 다수가 됐다. 더불어 문어, 낙지 등 두족류(머리 밑에 다리가 달린 연체동물)와 게, 바닷가재 같은 십각류(다리가 10개인 갑각류)도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문어와 낙지는 인간의 감각세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지하지만, 인간이 가진 감정, 개성, 미래 예측 능력을 가졌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선생님’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영국의 새 동물복지법도 이런 연구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런던정경대 연구팀에 동물의 고통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맡겼고, 연구팀은 △고통을 느끼는 수용체 △마취·진통제에 대한 반응 등 8가지 기준을 볼 때 기존의 척추동물 말고도 무척추동물인 두족류와 십각류도 고통을 느낀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번 동물복지법 개정안에서 지각 있는 동물의 범위가 확장됐다. 영국인이 ‘삶의 질’을 존중해야 할 생명체가 ‘(a)인간을 제외한 척추동물 (b)모든 두족류 (c)모든 십각류’(개정안 5항)로 넓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종은 사육과 포획, 도살 중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지도·감독할 의무를 국가가 진다.
물고기, 문어, 게도 인도적으로 도살해야 한다
물론 문어나 게에 감정이 있다는 게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와 너무 다른 감각기관을 가졌기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워서다.
하지만 2020년 선보여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선생님>을 통해 많은 이들이 문어가 개성과 창의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일부 나라에서는 지각이 있는 존재의 폭을 넓혔다. 스위스는 2018년 동물보호법을 개정해 바닷가재를 산 채로 끓는 물에 집어넣는 것을 금지했다. 대신 전기충격을 가해 기절시키거나, 물리적으로 뇌를 파괴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바닷가재를 얼음물에 담가 이동하는 것도 금지했다.
물고기의 경우, 유럽을 중심으로 ‘인도적 도살’ 원칙이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노르웨이는 2008년부터 전기충격이나 가격을 통해 양식 연어를 기절시켜 도살한다. 영국에서는 민간단체인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RSPCA)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절 뒤 도살 방식이 정착됐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소, 돼지, 닭 등 ‘가축’이라 부르는 동물들은 이미 법률로 정한 ‘인도적 방식’에 따라 도살되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진화한 아가미 구조 때문에 물고기는 공기 중에 놔두면 아주 느리게 죽어간다. 백번 천번 칼질당하여 죽는 ‘살천도’의 형과 비슷하다. 화천 산천어축제의 빙판 위에서 죽어가는 산천어. 남종영 기자
한국은 ‘지각 있는 존재’를 좁게 보는 편이다. 동물보호법에 따른 보호 대상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체계가 발달한 척추동물”(2조1항)로 한정된다. 원칙적으로 척추동물의 일종인 물고기도 포함되지만,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없다. 강원 화천군의 산천어축제에서 이뤄지는 맨손잡기 등 일부 행위가 ‘동물학대’에 해당한다며 동물단체가 화천군을 고발한 적이 있다. 검찰은 2020년 6월 산천어축제가 식용 목적의 행사로 동물학대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불기소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문어와 게의 고통에 대한 논의는 초보 수준일 수밖에 없다.
영국의 대형마트에 가면, 동물복지 계란이 아닌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동물복지 축산 체제로 전환에 성공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모습이다.
200년 전에 영국은 세계 최초로 동물복지법을 제정했다. 지금도 동물복지의 표준을 주도하는 나라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브렉시트 결정 이후 영국에서는 자체 기준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번 동물복지법 개정도 이에 따라 이뤄졌다. 현재 유럽연합은 법률에서 ‘동물이 지각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그 대상을 영국처럼 넓혀 구체적으로 규정하진 않는다.
영국은 이번 동물복지법 개정을 통해 △(해외 도살 목적의) 살아있는 동물의 수출 금지 △기념품(트로피) 야생동물 사냥물의 수입 금지 △상어지느러미 수입 금지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