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천년이 넘도록 콩과 곡장(穀醬, 간장, 된장, 청국장)의 종주국 지위를 누려왔지만, 희한하게도 이곳에서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콩과 장(醬)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콩과 메주를, 발효식과 장(腸) 건강을 잘 배우고 있는 걸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태부족할 텐데, 배울 수가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곳 동국(東國)은 대대로 산국(山國)이었고,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가꿔온 선조들은 울창한 산림을 보전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건만, 당대를 사는 우리에겐 이 전통에 대한 자각이 빈곤하다.
이를테면, 조선 시대를 살던 우리 선조들에게 산은 자신이 온 곳이자 돌아갈 곳, 생명의 태반 같은 곳이었다. 16세기 조선에는 무려 255개 고을에 진산(鎭山)이 있었는데, 진산이란 고을을 지켜주는 산을 뜻했다. 산이 없다면, 사람의 안녕도 없다는 인식이 이렇게 강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산이 아니라 산을 깎고 밀고 뚫어 통신 기지국과 송전망과 고속철도와 리조트 따위를 설치하는 일이 수백 배 더 중요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조상의 얼을 잃고 만 이러한 사태는 비극(Tragic Drama)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블랙코미디(Black Comedy)가 아닐까.
뼈아픈 단절.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동물은 아마도 범(*범, 호랑이라는 단어에 관해선 박스 글 참조)일 것이다. 한국을 딱 한 마디로 해보라면, 모든 유아에게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정작 호랑이 따위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기야 동물원 밖에서 본 적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을 알까. 한국은 범이 많았던, 그러나 범을 잃어버린(아니라면 쫓아낸) 나라다. 코리아에서 범은 동화나 창살에 갇히고 말았다.
민정기(1949~) 화백의 <인왕산 호랑이>(1996)는 그래서 고맙고 반갑다. 이 그림은 우리가 상실한 ‘범과 함께 산 전통’을 환기해주고 있다. 그림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인왕산이 눈에 보인다면, 인왕산을 호령하던 범을 기억하라. 그대가 범의 나라에서 나고 자랐음을 절대 잊지 마라. 인왕의 기상을 범의 기상을 배워라.’
우리 조상들은 범을 ‘산군’, ‘산왕’, ‘산신령’이라 하여 산의 왕으로 보았다. 산에서는 산군이, 산 바깥 인간계에서는 임금이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범이 준 공포와 범을 향한 외경은 둘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러한 외경이 단순히 과학에 몽매한 이들의 어리석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범은 제 분수를 모른 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포악한 포식자가 아니다. 냄새를 잘 알아채는 야콥슨 기관(Jacobson's organ), 인간보다 6배 높은 시력, 고도의 민첩성과 지능으로, 제 영토를 느긋이 지배하며, 절도에 맞게 먹고 숲의 동물 질서를 세우는 신령한 동물이 바로 범인데, 15세기에도 그러했고 21세기인 지금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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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과 인간이 공존하던 한국
데본기 후기인 약 3억6000만 년 전, 지구에 육상동물이 처음 나타난 이래, 적어도 포유동물이 번성하기 시작한 6500만 년 전 이래, 지상 최고의 지능을 선보인 두 종의 동물은 아마도 범과 인간일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범의 서식지는 코리아가 속한 땅인 아시아 땅이다. 코리아에서 범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피했다.
2017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캣 스페셜리스트 그룹(Cat Specialist Group)의 캣 분류 태스크 포스(TF)가 정한 바에 따르면, 범은 크게 2개의 아종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아시아 대륙에 서식하는 P. t. tigris 라는 아종으로, 벵골, 카스피안(멸종됨), 아무르(시베리아), 남중국, 말레이, 인도차이나 범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아종은 P. t. sondaica인데 순다 열도(Sunda Islands)에 서식하는 녀석들로, 자바(멸종됨), 발리(멸종됨), 수마트라 범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중국 청대 화가 조이궤이(鄒一桂, 추일계, Zou Yigui, 1686~1772)의 출중한 작품 <범(虎)>에 등장하는 범은 아마도 아무르 범이거나 남중국 범일 것이다. 어느 쪽인들 대수랴, 조이궤이의 이 그림은 “과연 범이구나!”라는 탄성을 우리의 목젖에서 뽑아 올린다.
이 그림에서 느낀 감흥을 이어 맛보려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범의 눈빛을 다시 지면(또는 화면)에서 보려면, 옛날 화가들보다는 현대 화가들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캐나다의 로버트 베이트먼(Robert Bateman, 1930~)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윌리엄 쿠퍼(William T. Cooper, 1934~2015) 같은 이들 말이다. 내게는 이들이야말로 미술계의 범들이다. (다음 편에 계속)
우석영 <동물미술관> 저자
*범과 호랑이, 어떤 용어가 맞을까?
동화 작가들, 동화를 출판하는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문제다. 이들이 한 국가의 언어, 즉 국어(國語)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들, 미래 세대의 언어 세계를 바로 이들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화에서는 ‘범’이라는 말 대신 ‘호랑이’라는 말이 선호되고 있다. 하지만 범을 지칭하는 대용어로서 호랑이라는 단어는 겨우 19세기에 등장했고, 엄밀히 따지면 엉터리 말이다. 만약 ‘외갓집’을 ‘외가’로 고쳐 써야 한다면(가家와 집은 동일한 뜻이므로), ‘창덕궁 팰리스’를 ‘창덕 팰리스’라고 불러야 한다면(Palace와 궁宮은 동일한 뜻이므로), 호랑이는 호(虎) 또는 범이라고 불러야 한다.
‘호랑(虎狼)이’라는 단어는 범(Tiger, 虎)과 늑대(이리, Wolf, 狼)를 통칭하던 ‘호랑(虎狼)’이라는 단어에 ‘이’라는 접미사를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虎狼)이라는 단어가 문헌에 나타난 것은 15세기였다. 그러다 19세기에 범과 늑대, 이 둘을 통칭하던 이 단어가, 범을 가리키는 언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다. ‘대충 쓰는 언어습관’이 그것이다. 외가를 외갓집으로 대충 불렀던 것처럼, 대충 불렀다. 다른 이유란 없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언중(言衆)의 것이므로, 언중의 합의 없이 바꾸면 안 되는 걸까? 그렇다면 왜 언중이 합의하지도 않았는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었던 걸까? 왜 충무시를 통영시로 바꾸었던 걸까?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관행이 있다면, 관행을 따라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