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항상 “우리 내일도 행복하자”고 히끄에게 이야기 해준다.
오조리 마을 산책을 하다가 귤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귤이 노랗게 변하는 모습으로 가을이 온 걸 알았다. 가을이 왔다는 신호는 또 있다. 여름에는 덥다고 잠을 따로 자던 히끄가 내 옆으로 와서 사람처럼 베개를 베고 잔다.
원래 히끄는 사계절 내내 나와 함께 침대에서 잤는데 어느 순간 침대를 벗어나 책상 위에서 혼자 잔다. ‘침대를 혼자 써서 편하다. 잠잘 때 히끄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기만 하지. 우린 독립적인 관계야’라는 생각과 별개로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 눈에는 아직 아이 같은데, 다 컸다고 독립하겠다는 자식을 보는 마음이 이런 걸까? 히끄와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더 그렇지만,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 떼지 않고도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나는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는 사람이다.
히끄의 아침밥과 화장실 청소만 아니면 계속 침대 붙박이로 살았을 것 같다. 특히 요즘같이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는 전기장판의 온기가 있는 이불 속에 더 있고 싶지만,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야 하고 당근밭도 둘러봐야 해서 침대에서 일어난다.
올해는 히끄와 함께 살고 있는 집 옆, 텃밭에 당근을 심었다. 텃밭은 여러 번 경험이 있어도 당근 농사는 처음이다. 어려운 작물 중에 하나라서 걱정됐지만, 운 좋게 태풍을 잘 넘겨서 쑥쑥 자라고 있다.
당근은 씨앗으로 파종하기 때문에 한 뼘 정도 자라면 일정 간격으로 뽑아내야 한다. 이 일을 ‘솎아내기’라고 하는데,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당근이 자라는 시기에 맞춰 3~4번 수시로 해야 한다. 당근을 제때 솎아내지 않으면 당근이 땅속에서 꽈배기처럼 서로 엉켜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당근 모양을 만들려면 계속 솎아줘야 한다.
그러나 막상 솎아내려고 하면 잎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풀어줘야 하고, 뭘 솎아내야 할지 고민이 되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솎아낼 때는 과감하게 넓은 간격을 두고 뽑아내야 한다. 아깝다고 생각해서 간격을 좁게 하면 옆 당근 때문에 크게 못 자란다. 작업을 하면서 잎을 손으로 자꾸 만지니 잎이 시들시들해지지만, 다음날부터는 건강하게 회복되어 좋은 당근의 밑거름이 된다.
털옷을 입고 있어서 추위를 안 타는 줄 알았는데 따뜻한 걸 무척 좋아한다. 히끄와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싶지만, 인간은 할 일이 많다.
당근 솎아내기는 인생과 비슷하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나만의 1인 1묘 가정을 꾸리는 데도 노력이 필요했다. 그냥 알아서 잘 굴러가는 집은 없다. 세면대 배수구 청소를 하면 누가 알까? 당장 티가 안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물이 잘 내려가지 않다가 막혀버린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히끄는 손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존재다. 하루에 여러 번 화장실을 치우며 바닥에 떨어진 털을 청소하며, 간식을 챙긴다. 히끄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잠잘 때 이불을 발로 차면 바로 다시 덮어주던 부모님처럼 히끄에게도 그런 아부지이고 싶다. 히끄와 함께 살고부터 나의 첫 번째 목표는 항상 좋은 반려인이었다. ‘일터로 나가라 나에겐 빚이 있다!’라는 표어 대신 ‘일터로 나가라 나에겐 고양이(히끄)가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따뜻한 이불을 벗어나서 출근하는 반려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사진 이신아 히끄 아부지·<히끄네 집>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