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란 고홍은 한자 높을 고(高), 큰기러기 홍(鴻)를 써 큰기러기가 높이 나는 모습을 비유해 지어진 이름이다.
제주한란의 꽃은 날아가는 새의 다양한 날개 형태를 닮았다. 비상하는 날갯짓과 착지하는 날갯짓 등 여러 가지 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어, 새가 꽃잎으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란은 제주도 한라산에 자생하는 난초과 식물이다. 자한란, 홍한란, 청한란 등 약 50여종이 있으며, 한란의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란의 한 종류인 ‘고홍’은 지인인 이중수씨의 난실에서 처음 보았다. 그는 20여년 간 한란에 심취해 오로지 제주한란만을 키우고 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큰기러기의 착지 전 모습.
큰기러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을 함께한다.
고홍은 이름이 아예 새를 가리킨다. 한자 높을 고(高), 큰기러기 홍(鴻)를 써서 큰기러기의 높이 나는 모습을 비유해 지어진 이름이다. 고홍의 자태는 그야말로 새가 고요 속에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큰기러기는 풍요로운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이자 더러운 땅에 앉지 않는 귀한 새다. 한번 짝을 지으면 영원히 부부의 연을 맺어 함께하며 암수 중 하나가 죽더라도 재혼을 하지 않는다. 이렇듯 가족애가 강한 새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와서 동절기를 보내는 겨울 철새로 몸길이는 약 85㎝ 정도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큰고니. 날개와 목이 길어 고홍을 더욱 닮았다.
고홍은 이름 탓에 일차적으로 큰기러기를 연상시키지만, 형상만을 놓고 보면 고니에 더 가깝다. 꽃의 맨 위쪽 주판(등꽃받침)은 앞으로 숙여져 쭉 뻗은 고니의 긴 목을 연상케 하고, 좌우의 부판(곁꽃받침)은 고니의 날개와 아주 흡사해 보인다. 길게 뻗어 나온 고홍의 꽃에 비하면 큰기러기의 목과 날개는 다소 짧기 때문이다.
제주한란 고홍이 바람결에 흔들리면 새가 빠르게 날아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물론 고홍의 작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기러기는 일반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친숙한 새이기 때문에 그리 이름이 지어졌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조류를 관찰하는 탐조가로서, 고홍의 꽃 형태가 큰기러기보다는 고니와 조금 더 닮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고니는 언제나 우아하고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는 귀족적인 새다. 고홍은 신비롭게도 이런 점까지 빼닮았다. 겨울철 우리나라를 찾는 고니는 기러기목 오리과의 동물이다. 고니, 큰고니, 흑고니가 있다.
고니의 몸길이는 평균 120㎝이지만, 혹고니와 큰고니는 각각 150㎝, 150㎝에 달해 대형 조류에 속한다. 고니와 큰고니는 암수 모두 온몸이 흰색인데 눈 앞쪽엔 털이 없이 노란색을 띤다. 혹고니의 부리는 선명한 주황색이고 부리의 기부와 머리 정면의 혹은 검은색이다. 하얀 털에 길고 가는 목이 특징이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재두루미의 나는 모습.
영역을 알리는 재두루미 부부. 왼쪽부터 어린 새, 수컷, 암컷이다.
고니류는 오리과 물새들 중에서도 가장 애교가 많은 종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을 때마다 양 날개를 펼쳐 날갯짓을 함과 동시에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일처제로 짝을 맺으면 평생을 같이 산다. 특히 혹고니는 특유의 겉모습과 아름다운 행동 때문에 창작물에서는 우아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유명 발레 작품인 ‘백조의 호수’와 관현악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에 주인공이 바로 혹고니다.
고홍이 고니를 떠올리게 한다면 ‘풍학’은 단연 두루미다. 단풍 풍(楓)에 두루미 학(鶴)자를 쓴다. 붉은 두루미란 뜻인데 옛 선인들은 ‘두루미가 깨달음을 얻으면 청학이 된다고 했다.
두루미는 신선이 타고 노니는 새로 천상의 새로 불리며, 수명이 길다하여 천년 두루미(학)라고도 불린다. 하늘 높이 날아 모습이 눈에 띄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려 더욱 고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무병장수의 상징으로 십장생도에 그려져 있다.
제주한란 명월. 날개를 내리고 나는 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몸길이는 136~140㎝, 날개를 펼친 길이는 약 240㎝에 달하고 몸무게도 10㎏에 이른다. 온몸이 흰색인데 머리 꼭대기의 피부는 드러나 있어 붉고, 이마에서 멱, 목에 걸친 부위는 검다. 검은 둘째날개깃이 꽁지를 덮고 있어서 앉아 있거나 걸을 때는 마치 꽁지가 검은 것처럼 보인다.
제주한란 홍화. 이름 없는 무명이지만 자태가 반듯하고 맑다.
제주한란 추사. 추사 김정희 선생은 조선후기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에 유배를 와서 9년이라는 긴 세월을 제주한란과 함께했다.
두루미는 몽골 동부, 시베리아의 우수리, 중국 동북부, 일본 북해도 동북연안에서 번식하고, 한국, 중국 동남부에서 월동한다. 흔하지 않은 겨울 철새이며 11월 중순에 우리나라를 찾는다. 천연기념물 제202호이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오른 위기종(EN)종이다. 전세계 생존 개체수는 약 2750마리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 대략 850~1000마리가 월동한다. 일본 북해도에는 1240마리가 정착해 텃새가 됐다.
제주한란 추광. 절제된 간결한 꽃잎이 인상적이다.
안아피기를 하는 제주한란 한아름. 새가 착지하기 전 속도를 줄이려 공기를 품는 모습과 비슷하다.
멸종위기 조류만큼이나 한란도 귀한 식물이다. 1967년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지정됐고 현재 3000촉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제주도, 일본 남부, 중국 남부, 대만에 분포하는데 꽃이 피는 시기가 11~1월로 추을 때 꽃이 핀다고 하여 한란(寒蘭)이라 한다. 상록성 여러해살이풀로서 잎은 3~4개가 달리고, 5~10개의 꽃이 연한 황록색 또는 홍자색 꽃이 핀다. 주된 자생지는 한라산인데 집중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돈내코(영천천) 계곡 일대는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있다.
재두루미 착지 모습. 도약할 때는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날개를 뒤로 마음껏 젖히지만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날개로 공기를 품는다.
고고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를 머금고 겨울에 꽃을 피우는 제주한란, 그리고 넉넉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우리나라를 찾는 겨울철새들이 이토록 빼닮은 건 그 자체로 자연의 신비인 것 같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촬영 디렉터 이경희, 김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