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뿌리를 잊고 살아왔다. 우리 모두가 바다에서 기원했건만, 우리가 온 곳을 잊은 지 오래다. 이런 망각의 역사는 회화사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약 3만 년 전부터 동굴에 벽화를 남기기 시작한 이래 우리 가운데 그릴 줄 아는 이들은 물고기를 천대하기 일쑤였다.
도감이나 백과사전에 기록될 일러스트를 괄호에 넣는다면, 대다수는 물고기를 ‘생물’이 아니라 ‘생선’으로 취급하곤 했다. (어류생태학자 황선도의 지적처럼, 가장 다양한 종수를 거느리는 척추동물군을 싸잡아 ‘물에 있는 고기’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오래된 무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상징적인 사례로 16세기, 네덜란드 남부 지역 플랑드르에서 활동하던 화가 요아힘 베케라르(Joachim Beuckelaer, 1533~1570/4)를 거론할 만하다. 이 화가가 화폭에 즐겨 담은 소재는 동물의 사체를 다루는 풍경인데, ‘어시장’(1568)에서도 우리는 같은 풍경을 본다.
이 그림에 놀고 다투고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가는 물고기는 없다. 바다에서 몇 년 살다 때가 되면 강의 상류로 올라가 산란하고 죽는 연어 떼의 신박한 여행 이야기도 없다. 숭어 떼의 연속 점프 같은 퍼포먼스는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눈에는 그저 생선과 생선을 담고 자르는 도구(바구니와 식용 도끼)가 들어올 뿐이다.
이 그림에는 자연과 인간과 신이 응결되어 있다. 노인이 들고 있는 이 식용 도끼는 인간 자신이자 인간이 모시는 신이다. 아이폰과 인공지능과 목성탐사선 ‘주노’는 이 식용 도끼를 시조로 삼고 있다.
하기야 경험의 시간이 앎의 시간보다 가혹할 정도로 길긴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잡아먹으며 살았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과학이 알려준 사실, ‘인간의 기원’이 데본기에 탄생했고 3억5천만 년 전 육지로 올라왔던 네 발 달린 물고기류(사지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물고기의 감정이나 지능에 관한 앎의 역사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장구한 암흑기에도 물고기를 예찬한 명작들이 종종 회화사에 출현하곤 했다. 그런 작품이 적지 않지만 여기서는 ‘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형상화한 중국화 몇 점을 소개한다. 먼저 볼 작품은 주동칭(周東卿, 생몰년미상, 중국 원대)의 <어락도>(1291). 길이가 장장 11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라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다. 전체 크기 가로 32.1cm, 세로 1122cm에 달하는 이 작품을 옆에 두고 완보하며 놀이하듯 시선으로 더듬으면 왕년에 놀아본 감각이 소생할 듯도 싶다.
그런데 물고기 하나하나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마냥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상상하려면 오히려 자오크시옹(趙克Y, 중국 남송)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어희도>(12세기 초)가 안성맞춤이다.
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그린 중국화들은 장자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장자, 당신은 물고기도 아니잖아. 물고기의 즐거움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장자가 응수했다. “당신은 내가 아니잖아,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이 어찌 알지?” (<장자>, 추수(秋水) 편)
둘의 설전이 장자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장자>에 적혀 있지만,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정말 알았다 해도 그건 직관적 앎에 불과했다. 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에 관해서라면, 동물행동학자 고든 버가르트(Gordon M. Burghardt)가 자신의 책 <동물 놀이의 탄생>에서 12가지 물고기들의 놀이 방법을 소개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2005년, 이 책을 출간하며 버가르트는 장자의 오래된 가설을 입증했다. ‘물고기는 놀 줄 알기에 즐겁다!’는 가설 말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13세기 남송 시대 화가 판안롄(范安仁)이 그린 <어조도>로 시선을 옮겨보자. 이 그림을 고른 건 바닷물고기들의 무리 헤엄(군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청어나 날치, 멸치, 정어리 등의 무리가 뭉치고 나뉘었다 다시 뭉치고, 갑자기 돌고 솟구치고 수축했다 팽창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구가 만들어낸 장관’이다. 그런데 이들은 거대한 무리를 이루려는 의도를 사전에 갖지 않는다. 개별자는 각기 옆에 있는 친구들 곁에 붙어서 옆 친구들과 동작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이런 친구들의 수가 불어나 거대한 무리로 귀결될 뿐이다. 동작의 변화는 주로 ‘옆줄’이라는 기관을 통해 상호 인지된다. 또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히 거리를 벌리되, 순간의 동작 변화를 민감하게 인지하려고 서로 간의 거리를 아주 가깝게 유지해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충돌하는 요구 사이의 균형이 그야말로 절묘하다.
충분히 가깝지만 결코 부딪히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어 이합과 집산, 수축과 팽창을 자유자재로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군영이 아니라 차라리 군무일 것이다. 올림픽 개막식장에서 4년마다 군무를 보며 확인하는 우리의 이상(理想)을, 어떤 이들은 나날이 바다라는 무대에서 아무렇게나 시연하고 있다.
<어락도>나 <어희도>에서 보이는 ‘즐거움’과 <어조도>에서 엿보이는 ‘춤으로 구현되는 협동’.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겠지만, 요새 나는 부쩍 판안롄의 <어조도>를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된다. 청어나 날치들처럼 우리에게도 옆줄 같은 것이 있어서 함께 춤추듯 살 수는 없는 걸까? 악성 댓글이 사람을 잡아먹고, 밥 먹듯 상대를 고소하며, 증오의 정치가 공론장의 가능성을 집어삼키는 시대에 어림없는 생각이긴 하다만, 도리어 그래서인지 나는 ‘춤이 곧 삶’이 되는 풍경을 떠올리며 이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동물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