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 투표일인 9일 오전 경북 울진군 울진읍 울진국민체육센터 투표소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탄 산불 이재민 전남중씨가 불에 탄 주민등록증을 대신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 발급신청 확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산불 피해민은 “복구”, 접경지역민은 “남북평화”를 위해 한표를 던지러 나섰다. 화창한 날씨 속에 제20대 대통령선거가 열린 9일, 전국 투표소는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는 시민 발길이 꾸준히 이어져 오후 3시 현재 사전투표를 포함해 투표율 68.1%를 보이고 있다.
이날 오전 투표를 하기 위해 경북선관위가 제공한 버스에 오른 전남중(84)씨는 이번 울진·삼척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이다. 신분증이 불에 타 투표를 못할 뻔 했으나 관계기관이 주민등록증 발급신청 확인서를 내줘 소중한 한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대피소인 울진군 국민체육센터를 나서면서 “산불로 집까지 타버렸지만 당연히 투표는 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집부터 복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원 동해에서도 지난 5일 옥계 산불로 집과 창고 등을 모두 잃은 이재민 신원준(75·동해시 옥계면)·손복예(66)씨 부부가 망상초등학교에 마련된 망상제1투표소에서 투표했다.
산불 진화로 피로가 누적된 산불진화대원과 소방관들도 이날 짬을 내 투표소를 찾았다. 한홍섭(64) 삼척시 산불진화대장은 “지난 4일부터 산불 진화 업무에 투입됐기 때문에 진화대원 대부분이 사전 투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투표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 만큼 오전 6시30분에 잠시 짬을 내 투표소를 다녀왔다. 나머지 진화대원 100여명도 교대로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인통제구역인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통일촌) 마을회관 2층, 장단면 제1투표소에서는 접경지역인 통일촌 마을과 대한민국 유일 디엠제트 마을인 조산리(대성동마을) 등 두 마을 주민 519명 투표가 진행됐다. 주민들은 차기 정부의 과제로 남북평화와 경제안정을 꼽았다.
조산리 주민 이아무개씨는 “남북관계가 안정돼 외부인의 마을 왕래가 자유롭고 관광 활성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했다”고 했고, 한선희(66) 통일촌 마을 부녀회장은 “새 정부가 코로나 종식과 경제 발전, 국민 통합, 남북 평화 증진을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섬이 많은 전남 신안군 주민들은 투표소가 마련된 읍, 면소재지를 향해 배를 타고 이동했다. 목포에서 배로 3시간30여분 걸리는 흑산면 상태도, 중태도 주민들은 어선을 타고 화태도 투표소로 향했고 압해읍 효지도 주민들은 육지에 있는 압해읍 투표소를 찾아 권리를 행사했다. 고령층이 많은 전남 각 시·군에서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오지마을 주민을 위해 준비한 투표 지원 버스에 타려는 행렬이 이어졌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오대리 주민들이 9일 오전 투표를 하기 위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옥천군청 제공
대청호에 둘러싸여 육지 속 섬마을이 된 충북 옥천군 옥천읍 오대리 주민들은 이날 배를 타고 500m 남짓 호수를 가로질러 옥천읍 죽향초 투표소를 찾았다. 주민 이세원(71)씨는 “투표소가 멀지만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는 데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려고 나왔다”고 밝혔다. 청주 성안동 1투표소에서 만난 이아무개(75)씨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투표했다. 노인, 아이 모두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대전도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을 했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대전 서구 둔산동 충남고에 마련된 둔산1동 제4투표소에서 만난 성아무개(39)씨는 “솔직히 찍을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는 나라에 도움이 될 후보를 선택했는데, 이번에는 나와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될 것 같은 사람을 뽑았다”며 “새 대통령은 정파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면 좋겠다”고 바랐다. 김아무개(45)씨는 “네거티브가 유독 심했던 것 같다. 차기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를 잡아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청주시 성안동 제1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려고 줄을 서고 있다. 오윤주 기자
이날 0시 기준 코로나19 하루 확진자가 처음으로 3만명을 넘어선 부산에선 오후가 되면서 투표율이 올랐다. 이날 정오 투표율이 19.9%로 같은 시각 19대 대선 투표율 24.2%에 견줘 4.3%포인트 낮았으나 오후 1시엔 58.2%로 19대 대선의 52.6%와 비교해 5.6%포인트 높았다. 이어 오후 2시엔 61.6%를 기록하며 19대 대선 57.1%에 견줘 4.5%포인트 높았다.
제주 투표율도 오후 2시 현재 61.9%로, 같은 시간 역대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때의 투표율보다 높게 나타났다. 지한봉 마라리 어촌계장은 “바다가 사막화 현상으로 해산물이 고갈된 상태이다. 새 대통령은 어민 소득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원도에서는 사전투표를 마친 유권자가 본 투표장에서 또다시 투표용지를 받는 일이 발생하는 등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 관리’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날 강원도선관위의 설명을 종합하면, 사전투표자인 ㄱ씨(60대)는 이날 오전 10시30분께 강원도 춘천시 중앙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신분증을 제출한 뒤 투표용지를 받았다. 규정대로라면 신분증 확인 과정에서 선거사무원들은 ㄱ씨가 사전투표를 한 사실을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배부하지 말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투표용지를 받은 ㄱ씨는 기표를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사전투표자란 사실을 밝힌 뒤 “사전투표를 한 유권자에게 투표용지를 또 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ㄱ씨는 이날 사전투표를 하지 않은 아내와 함께 투표소를 찾았다가 투표소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투표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춘천시선관위는 ㄱ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공직선거법 163조(투표소 등의 출입제한) 1항에는 투표하려는 선거인 등만 투표소에 들어갈 수 있는데도 ㄱ씨는 이를 어기고 투표소에 출입했다는 것이다. 또 248조(사위투표죄) 1항에도 성명을 사칭하거나 신분증명서를 위조·변조해 사용하는 등 기타 사위(거짓으로 꾸민)의 방법으로 투표하거나 하게 하거나 또는 투표를 하려고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강원도선관위 관계자는 “선거사무원이 ㄱ씨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전투표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교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사전투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투표하려 한 행위는 선거질서를 문란하게 한 명백한 선거범죄”라고 말했다.
대전에서는 이날 오전 한밭중 투표소에서 40대 부부가 “투표용지가 이상하다”며 영상을 찍고 참관인들과 다투는 등 소동을 벌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부산도 투표 과정에서 소란이 일었다. 부산시선관위는 “아침 6시20분께 부산진구 부암1동 제2투표소에서 투표용지를 촬영한 50대를 적발했다. 경찰에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송인걸 기자,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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