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 사건의 희생자인 정재식(사망 당시 27살)씨의 아들 정아무개씨가 지난달 13일 부산고법 정문 앞에서 <한겨레>와 만나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의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산/김영동 기자
“아버지, 죄송합니다.”
정아무개(68·부산 사하구)씨는 지난달 7일 <한겨레> 기자에게 질곡의 삶을 들려주면서 “대구 10월 사건은 나와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줬다. 국가가 잘못을 했다면 국민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나중에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면 가장 먼저 용서를 빌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1948년 경북 칠곡군에서 아버지 정재식씨와 어머니 이아무개(87)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일본 오키나와 비행장 건설에 강제동원됐다가 1946년 2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10월1일 대구의 노동자와 농민 등이 해방이 됐음에도 친일 경찰을 그대로 고용하고 쌀을 강제로 걷는 미 군정에 항의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대구 10월 사건이다.
경찰이 대구역 등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사태는 악화했다. 미군정이 10월2일 계엄령을 선포해 진압에 나섰지만 시위는 칠곡군 등 경북으로 번졌고 12월엔 남한 전역으로 퍼졌다. 이 과정에서 다수 민간인이 죽었고 일부 경찰도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10월2일부터 11월 말 사이에 경북에서 7400여명, 대구에서 2250명이 검거됐다. 이 중 6580명은 석방됐으나 석방되기까지 경찰에서 받은 가혹한 처우는 미군들 사이에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1947년 1월24일치 <대구시보>)
대구 10월 사건 희생자 아들 정씨
평생 동안 ‘빨갱이’ 손가락질 고통
1946년 10월 대구 시위관련된 아버지
3년 뒤 경찰에 끌려가 재판없이 피살
손배소송하며 54년만에 어머니 만나
대법 어이없는 판결…“아버지 죄송해요”
경찰은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도 시위 참가자와 가족들을 붙잡아 고문하거나 사살했다. 희생자 가족은 요주의 대상이었는데, 정씨 아버지도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철도 노동자였던 정씨 큰아버지가 대구 10월 사건 관련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정씨 아버지가 마을에 식량을 강제로 걷으러 온 경찰을 막아서는 데 앞장섰다는 주민의 밀고도 있었다.
정씨 아버지는 1949년 5월 칠곡경찰서로 연행됐고 결국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 벼랑골에서 경찰에 사살됐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대구 10월 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첨부자료)
정씨 어머니는 이후 마을 주민들에게서 ‘빨갱이 마누라’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친인척조차 모자를 핍박했다. 한국전쟁 뒤 마을 주민과 친인척들은 모자를 더 모질게 대했다고 한다. 결국 정씨 어머니는 정씨가 11살 때인 1959년 정씨 형제를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씨는 이후 외갓집, 친척 집, 친구 집을 떠돌며 눈칫밥을 먹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4대 국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과 관련해 ‘양민피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꾸렸다. 정씨 친할아버지는 그해 6월11일 칠곡군에 아들의 피살 사실을 신고했다. 칠곡군수는 같은 달 24일 양민피살사건 조사의원한테 신고서를 제출했다.
경북 칠곡군수가 1960년 6월24일 4대 국회 ‘양민피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제출한 정재식씨의 피살 신고서. 받는 사람에 서울특별시 민의원(국회) 내 양민피살사건 조사의원 윤용구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은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부산/김영동 기자
국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4대 국회 ‘양민피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피살자 명단에 정재식씨의 이름(붉은 형광펜)이 적혀 있다. 부산/김영동 기자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국회가 해산되면서 진상조사는 흐지부지됐고, 친할아버지는 피살사건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 다녔습니다. 우리 가족한테 ‘빨갱이’란 낙인도 다시 찍혔습니다.”
정씨가 17살 때인 1965년 친할아버지가 숨지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정씨는 어머니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1968년 경북 상주시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겨우 찾았다.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과 사별하고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정씨는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 그는 선원 모집에 지원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졌다. 1969년부터 부산항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1972년 베트남전 군수품 보급 선박 관련 작업 등에 지원했지만 신원조회가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빨갱이’ 낙인 때문이다. 그는 ‘빨갱이’ 아버지를 원망하며 술로 가슴속 응어리를 달랬다.
정씨는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됐다는 친척의 말을 듣고 2004년 12월 부산시에 신고했다. 그는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행적을 조사했다. 1949년 아버지가 경찰에 살해됐다고 확신했다.
‘대구 10월 사건’의 희생자인 정재식씨의 아들 정아무개씨가 부산 사하구 신평동 집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산/김영동 기자
정씨는 노무현 정부가 2005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만들고 진실화해위원회를 꾸려 대구 10월 사건 민간인 희생자를 조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진실규명 신청 기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2009년 10월 진실화해위원회 김아무개(54) 조사관한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알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3월30일 ‘해방 뒤부터 한국전쟁까지 대구·칠곡·영천·경주 등 4곳의 주민 105명이 재판 절차 없이 경찰 등에 사살됐다’는 요지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정씨 아버지도 희생자 명단에 있었다.
정씨는 2011년 4월 부산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이듬해 5월24일 어머니를 청구권자로 한 대리 소송도 따로 제기했다. 모자는 1심 법원에서 승소했지만 국가는 항소했다. 2심 재판 과정에서 정씨는 법정 증인으로 나온 어머니를 54년 만에 만났다.
“남편이 왜관(현 경북 칠곡군) 뒷산 골짜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갔는데 거적에 덮여 있었어요. 주검 옆구리에 총상이 있었지요. 다음날 다시 가서 흙만 덮고 2년 있다가 고향에 묻었어요. 남편이 죽은 날이 음력 4월22일(양력 5월19일)입니다.”(2013년 9월5일 정씨 2심 재판 3차 변론에서 어머니 이씨 증언)
정씨 어머니는 당시 변론에서 판사의 마지막 질문에 “그 어린 것을 두고 50년 넘도록 가지 않았으니 아들 볼 면목이 없다. 어미인 내가 이 사건 증언은 한 번 해주자고 생각해 (법정에) 왔다”고 말했다.
모자는 법정 밖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씨는 “어머니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절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다 맞은 어머니가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남편이 숨진 날을 정확히 기억한 어머니의 증언은 항소심에서 중요 증거로 채택돼 정씨의 승소를 끌어냈다.
1·2심에서 각각 승소한 모자의 판결은 대법원에서 갈렸다. 어머니는 대법원에서 일부 승소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정씨는 패소했다.
“헌법 10조는 국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책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국가는 지금도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한 맺힌 정씨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부산/김영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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