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전국일반

“경로당서 12시간 보내…외로움 함께 달래지만 사람 그립지요”

등록 2016-12-19 02:49수정 2016-12-20 10:44

[대한민국 경로당 보고서 (상)]
외딴섬 주민 17명 중 11명이 노인
“경로당은 사랑방이자 공동일터
대소사 결정하는 리 사무소 구실도”

오전 9시면 경로당으로 ‘출근’
두 사람만 모여도 함께 밥 차려
“여럿이 수다떠는 점심 기다려져”
저녁엔 자식 전화 학수고대
밤 9시에야 어둔 골목 걸어 집으로

가장 두려운 건 큰병 응급 상황
한해 한두번 헬기 부르는 위기 닥쳐
노환에 빚 늘어 파산 내몰린 분도
“가난 질병 고독은 여전한 과제”

전남 영광 하낙월도 경로당의 하루
전남 영광 하낙월도 경로당의 하루
전국의 경로당은 6만4천여개다. 골목마다 들어찬 편의점보다 두 배나 많다. 노인층의 30~40%가 경로당을 드나들 만큼 노인들의 거주 공간이자 놀이터이고 식당의 구실을 한다. 경로당은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한국 사회 고유의 돌봄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도 경로당은 여태껏 관심 밖에 밀려나 있다. <한겨레>가 도시와 농촌의 경로당 한 곳씩을 찾아 70~80대 노인들을 만났다. 이를 통해 나이가 들수록 짙어지는 가난과 질병, 고독의 그림자에 다가가 봤다. 경로당의 기능을 사랑방과 급식장에서 공동살림집이나 마을복지센터로 확장하려는 시도도 들여다본다.

“심심하고 지루허제~. 나이를 묵으면 사람이 더 보고자퍼~.”

낙월도 왕언니 정막례(85)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스쳤다. 황혼 무렵 마신 소주 석 잔이 약해지지 말자던 결심을 흔들어 놨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과 뭍으로 나간 6남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긴긴밤 그는 사진틀을 끌어안은 채 진도아리랑을 낮게 읊조렸다. 방문 앞까지 다가온 바다가 함께 흐느꼈다.

지난달 초순 찾은 전남 영광군 낙월도(落月島). 이름처럼 ‘달이 지는 섬’이다. 서울에서 300㎞ 떨어진, 서해 끝자락에 가물가물 떠 있는 멀고 먼 섬이다. 배편은 하루 3차례뿐이다. 새우잡이로 영화를 누렸던 70년대에는 주민 5000여명이 북적였다. 목포에서 8시간 걸리는 불편한 교통 때문에 떠나는 행렬이 줄을 잇더니 이제 300여명으로 줄었다. 그나마 면사무소가 있는 상낙월도는 초등학교와 보건지소가 남아 상황이 좀 낫다. 섬세가 약한 하낙월도는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변방 속의 변방으로 남았다.

하낙월도에 사는 주민은 모두 17명이다. 이 가운데 나이 65살 이상인 경로당 회원이 11명이다. 얼마 전까진 16명이었는데 5명은 뭍으로 나갔다. 치매·중풍을 앓는 3명은 육지 요양원에 입원했고, 노환으로 약해진 2명은 육지 자녀 집에서 지낸다. ‘나이가 어려’ 경로당 정식 회원이 못된 나머지 주민 6명 가운데 막내가 58살이다.

하낙월 경로당 앞에 선 마을 어르신들. 경로당 살림을 맡은 회장 장영진(72·오른쪽 두번째)씨, 낙월도 명가수인 왕언니 정막례(85·가운데)씨, 마을의 유래와 지명을 줄줄이 꿰는 총무 정예순(81·왼쪽 두번째)씨.
하낙월 경로당 앞에 선 마을 어르신들. 경로당 살림을 맡은 회장 장영진(72·오른쪽 두번째)씨, 낙월도 명가수인 왕언니 정막례(85·가운데)씨, 마을의 유래와 지명을 줄줄이 꿰는 총무 정예순(81·왼쪽 두번째)씨.
경로당은 어르신들의 사랑방이자 휴식처다. 손님을 맞거나 식사를 함께한다. 리 사무소, 여객 대합실, 공동 작업장, 마을 복지센터 등으로도 쓰인다. 이장 이순애(60)씨는 “경로당이 섬마을 공동체의 중심이다. 마을회관이 없어 이곳에서 모임을 열어 대소사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20년 전인 96년 마을 소유로 1층 한옥 경로당을 지었다. 마을 한가운데 전망이 탁 트인 바닷가를 골랐다. 창문을 열면 여객선이 들고나는 장면이 훤히 보인다. 지난해 2000만원을 들여 화장실을 옮기고 부엌을 고치는 보수를 했다. 난방은 기름으로, 냉방은 전기로 바꾸자 버젓한 현대식 건물이 됐다. 내부 66㎡(20평)엔 방 2칸, 화장실, 창고 등이 있다. 거실에는 텔레비전·냉방기·냉장고·싱크대·전기밥솥·커피포트 등이 갖춰져 있다. 안방에는 마을 방송을 하는 확성기와 10년을 묵어 고장 난 노래방 기계, 창고에는 이부자리와 농악기구가 각각 놓여 있다.

바닷가에 1층 한옥으로 들어선 하낙월 경로당. 마을의 사랑방이자 휴식처, 회의장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바닷가에 1층 한옥으로 들어선 하낙월 경로당. 마을의 사랑방이자 휴식처, 회의장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경로당은 농번기 며칠을 빼고 연중 개방한다. 매일 오전 7시쯤 문을 열어 밤 9~10시쯤 닫는다. 장영진(72) 회장과 정형철(83) 전 회장이 현관 열쇠를 관리하지만 낮엔 늘 열려 있다.

문을 여는 이는 정 전 회장이다. 10여년 동안 회장을 지냈던 그는 2년 전 후배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후에도 가장 먼저 나와 안팎을 청소한다.

오전 9시쯤엔 할머니들이 경로당으로 슬슬 출근(?)한다. 언니와 동생의 안부를 확인하고, 늦는 이한테는 전화를 걸어 챙긴다. 이들은 고립된 섬 안에서 시집·장가를 들어 대부분 친인척이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 흉허물도 없다. 서로 눈빛만 봐도 걱정거리가 생겼는지 아픈 데가 도졌는지 금세 알아차린다.

두세 명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따로 일하는 순서를 정해두지는 않았다.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냉장고를 열고 찬거리를 고른다. 텃밭에서 기르는 상추와 호박도 챙긴다. 전기밥솥에 7~8인분 정도의 쌀을 안치면 점심때 10여 명이 먹고 2~3명은 저녁과 아침을 때울 수 있다.

하낙월도 경로당의 점심 식사 상 차림.
하낙월도 경로당의 점심 식사 상 차림.
여럿이 차린 점심상이 하루 중 가장 푸짐하다. 사시사철 인근 바다에서 나온 새우·조기·우럭 따위 해산물이 오른다. 이 곳의 특산품인 오젓·육젓·동젓으로 담근 김치는 아삭하고 시원해서 밥맛을 돋운다. 보릿고개를 겪은 연배들이라 아직도 쌀밥을 선호한다. 정예순(81) 할머니는 “혼자 식사하는 것이 고역이어서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점심이 기다려진다. 젊었을 적 보릿고개를 떠올리면 경로당 진수성찬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하낙월 경로당의 즐거운 점심시간. 경로당 어르신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할 때가 많다. 할아버지들은 큰 상을, 수가 많은 할머니들은 작은 상을 받았다. 밥상 위에 놓인 싱싱한 생새우젓과 곰삭은 밴댕이젓이 식욕을 돋운다. 국거리와 반찬류는 대부분 인근 바다와 텃밭에서 나온다.
하낙월 경로당의 즐거운 점심시간. 경로당 어르신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할 때가 많다. 할아버지들은 큰 상을, 수가 많은 할머니들은 작은 상을 받았다. 밥상 위에 놓인 싱싱한 생새우젓과 곰삭은 밴댕이젓이 식욕을 돋운다. 국거리와 반찬류는 대부분 인근 바다와 텃밭에서 나온다.
점심 이후 오후 시간은 무료하고 따분하다. 매주 화요일엔 상낙월도에 있는 공중목욕장에 가지만 그때마다 면사무소 차량을 부르는 것이 미안해서 요즘은 뜸해졌다. 낙도라서 여가프로그램을 제공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심풀이 화투놀이도 이젠 시들해져 쳐다보지 않는다. 하릴없이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이남례(74)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면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던데 여기는 안 오냐”고 아쉬워했다. 주민들은 몇해 전 군 농악경연에서 우승할 정도로 높은 기량을 뽐냈다. 이후 사람들이 떠나고 농악을 칠 기회도 없어 전통마저 사라지고 있다.

경로당 한 달 운영비는 27만원이다. 인원이 20명 미만이어서 영광군에서 최소한으로 지원한다. 회비는 없고 찬조도 없어 살림이 빠듯하다. 이 돈으로 전기료·수도료 등 공과금을 내고 부식과 반찬을 사고 있다. 석 달마다 들어오는 운영비는 현금 카드로만 지출한다. 점검에 대비해 카드내역과 증빙서류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장 회장은 “섬에서 카드를 쓰라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영수증을 챙기려고 한 달에 두세 번은 일부러 뭍에 나가 시장을 본다”고 하소연했다.

섬에서는 오후 5시면 겨울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어르신들은 가끔 소주 한두 잔으로 외로움을 달랜다. 이웃의 생일이나 친지의 방문을 구실 삼아 귀가시간을 될수록 늦춘다. 권커니 잣거니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한 곡조씩 이어가며 서로를 위로한다.

홀로 사는 정막례 할머니는 진도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잘 부른다. 노래를 벗 삼아 노후를 꿋꿋하게 버텨왔다. 그는 “노래가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얼마 전 노래방 기계가 고장 나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었다”고 한숨지었다.

저녁 시간에는 너도나도 자식들의 전화를 학수고대한다. 안부 전화는 어르신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주는 청량제다. 시간에 맞춰 오는 전화가 빠지기라도 하면 주변에서 서로 도닥거려 준다. 장 회장의 부인 최영애(67) 씨는 “돈도 뭣도 안 바라요. 자식들한테 오는 전화가 제일 반갑지”라고 전했다.

밤 9시 즈음 어르신들은 어두운 골목을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경로당이 아늑하고 따뜻해도 아직은 익숙한 집에서 자는 게 더 편하다. 한두 명은 아예 이곳에서 생활하기를 바라지만 종일 운영이 아직 부담스럽다. 무릎수술을 받은 3명을 위해 아직 소파조차 들여놓지 못한 형편 탓이다.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수록 하낙월과 경로당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뭍에서 살다 돌아온 정 할아버지는 “아파트는 감옥이야 감옥! 먹을 것도 많고 돈 쓸 일도 없는 하낙월이 좋아. 내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으니까”라고 웃었다. 장 회장은 “우린 낙월도를 낙원으로 여긴다. 큰 병이 나면 어쩔 수 없이 뭍으로 가야 한다. 아프지 않고 이 섬 안에서 살다 편안히 죽고 싶다”고 밝혔다.

어르신들은 응급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경로당에서 가장 가까운 의료시설은 2㎞ 떨어진 상낙월도에 있다. 갑자기 병이 생기면 차편을 수소문해 보건지소를 찾아간다. 87년 두 섬을 잇는 470m짜리 둑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배로 갔다. 상태가 위중하면 헬기에 실려 광주나 목포로 나간다. 한해 한두 번은 헬기를 불러야 하는 위기가 닥친다. 그때마다 ‘골든타임’ 안에 병원에 도착하지 못할까봐 가슴을 졸여야 한다.

부부 중 한 명이 병에 걸리거나 빚이 늘어나서 노후 파산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해묵은 농어촌의 고리채는 20만원 이하 노령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어르신한테 웃음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 주민 가운데는 지난 1984년 빌린 720만원이 6000만원대로 불어난 경우가 있다. 조상한테 물려받은 부동산이 약간 있어도 토지 3.3㎡(한평)는 2만 원대, 집 한 채가 2000만~3000만원에 불과한 상황에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농어촌에는 대출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갚았다고 착각했다가 뒤늦게 원리금 폭탄을 맞고 곤경에 빠진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

주민 최학균(60)씨는 “하낙월 역시 가난·질병·고독이 어르신들의 과제다. 경로당 안에서 공동 작업으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갯벌체험, 귀촌마을 등 특색사업을 추진하려 한다. 이대로 가면 20년 뒤에는 경로당뿐 아니라 마을까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크다”고 전했다. 낙월도/글·사진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1.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2.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3.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4.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5.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