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떠오른 팽목항에 모인 미수습자 가족들
사무치는 그리움… 눈물…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가족의 품으로”
사무치는 그리움… 눈물…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가족의 품으로”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오른 23일 자식을 기다리던 어머니들이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사무치는 그리움을 쏟아냈다. 80대 노모와 40대 엄마는 3년째 돌아오지 않는 아들과 딸의 사진을 부여잡고 울고 또 울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엄마가 왔다.”
이날 낮 12시께 팽목항 세월호 분향소. 단원고 양승진 교사의 어머니 남상옥(84)씨가 분향소 바깥벽에 걸려있는 미수습자 9명의 사진 중 아들의 사진에 달려갔다. 허리를 꺾은 남씨는 주름진 손으로 아들 사진을 쓰다듬었다. 설움이 복받친 노모는 울음을 토하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경기도 안성에 사는 노모는 선체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팽목항으로 다급하게 내려온 터였다. 동행한 양 교사의 동생 승찬(58)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신다”고 말했다. 한참 만에야 진정한 노모는 “우리 아들이 제자들을 지키느라 나오지 못했다. 착하고 효자였다. 이번에는 꼭 나와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 과목을 가르쳤던 양 교사는 세월호 참사 때 선체가 기울자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고 배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미수습자 9명의 가족들은 3년 동안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텨왔다. 희생이 컸던 단원고에선 학생 4명(남현철·박영인·조은화·허다윤)과 교사 2명(고창석·양승진)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수학을 유독 좋아했던 조은화양은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다. 숫자 계산과 문제 풀이에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회계 분야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었다. 집에선 엄마와 무척 가깝게 지냈다. 등교할 때면 ‘버스에 탔다’고, ‘어디를 지났다’고, ‘학교에 도착했다’고 일일이 문자를 할 정도로 엄마에게 살가웠다.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었던 허다윤양은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다. 중학생 때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걸 즐기는 고교생이었다. 아버지의 검정 모자가 마음에 든다며 이를 빌려 수학여행을 나선 것이 마지막 모습으로 남았다. 다윤양 어머니 박은미씨는 “아빠의 모자는 올라왔는데, 다윤이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눈물지었다.
박영인군은 성격이 발랄하고 쾌활했다. 2남 중 막내로 딸 같은 귀염둥이였다. 엄마를 도와 집안일도 척척 해냈다. 아버지와도 스스럼없이 장난치며 대화를 자주 나눴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따라 여행하는 걸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야구 등 구기 종목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만능스포츠맨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볼링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축구를 좋아해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차는 게 일상이었다. 체대로 진학해서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영인군의 어머니 김선화씨는 “아들이 원하던 축구화를 미처 사주지 못해 걸린다. 사고 이후 새 축구화를 팽목항에 가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파했다.
남현철군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이다운군의 자작곡 <사랑하는 그대여>에 노랫말을 붙였다. 현철군은 기타를 잘 치는 등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체육을 가르쳤던 고창석 교사는 세월호 참사 한 달 전인 2014년 3월 단원고에 발령받았다.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그는 대학생 때 인명구조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 사고 당일에도 고 남윤철 교사와 함께 학생들의 탈출을 돕느라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 교사는 인근 단원중 교사였던 아내를 끔찍하게 아꼈다. 아내가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하면, 학교 담장 너머로 간식거리를 전해주곤 했다. 그는 당일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문자를 아내에게 보낸 뒤 뒤 더는 소식이 없다.
미수습자 중 가장 어린 혁규(당시 7)군은 아버지 권재근(당시 51)씨와 어머니 한아무개(당시 29·사망)씨, 여동생 권지연(당시 6·구조)양 등 가족과 함께 길을 떠났다. 아버지가 서울 생활을 끝내고 감귤 농사를 지으려고 제주도로 귀농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날 화물차에 이삿짐을 싣고 제주도 새집으로 이사하던 길에 희생자(어머니)·생존자(딸)·미수습자(아버지·아들)란 이름으로 헤어져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권군은 사고 당시 어머니를 도와 한 살 어린 여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탈출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부 이영숙씨는 1년 뒤 제주도로 이사올 아들의 짐을 싣고 가다 사고를 당했다. 아들과 떨어져 살던 이씨는 아들과 함께 지낼 시간을 그렸지만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이날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한테 “최우선으로 미수습자를 찾아달라”고 오열했다. 이들은 “이제 아이들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했다. 가족들은 2015년 4월 세월호 선체 인양이 결정된 뒤 명칭을 ‘실종자’에서 ‘미수습자’로 바꿨다. 미수습자는 정부가 수색을 완벽하게 못해 아직 수습하지 못한 사람이란 뜻이다. 중립적인 개념인 실종자와 달리 미수습자에는 정부의 책임과 의무가 담겨있다고 여긴다. 진도/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그림 박재동 화백
팽목항 분향소 제단의 단추 조형물
팽목항 분향소 들머리에 설치된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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