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이 총을 든 채 반란군을 감시하고 있다.여수지역사회연구소 누리집 갈무리
여순사건 때 아무런 근거 없이 반란군을 도왔다며 사형을 당했거나 형무소에 갇힌 뒤 한국전쟁 때 살해당한 희생자 4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여순민중항쟁전국연합회는 19일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1부(재판장 허정훈)가 연 재심 선고공판에서 고 박채영(사망 당시 35살), 박창래(40살), 심재동(37살), 이성의(25살)씨가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8월29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재판장에게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전남 여수에 살았던 박창래씨와 박채영씨, 심재동씨는 1948년 10월 말 여수·순천지역을 탈환한 정부 진압군에게 붙잡혔다.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였다. 반란군이 여수를 점령했을 당시 화양면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됐던 박창래씨는 체포된 당일 군인들이 집을 불태워 가족들이 친척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광주호남계엄사령부는 1948년 12월13일 396명에 대한 호남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를 열어 박창래씨와 박채영씨에게는 내란죄, 포고령 위반(국권 문란) 등의 혐의로 사형, 심재동씨에게는 포고령 위반(공중질서 치안문란) 등으로 징역 5년 선고했다. 박창래씨와 박채영씨는 이듬해 1월13일 여수 만성리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형을 피한 심씨는 충남 공주형무소에 수감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9일 경찰 등에 의해 공주 왕촌 살구쟁이 숲에서 희생됐다.
순천(당시 승주군) 서면 동산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씨는 여순사건 때 출근했다는 이유로 직장 세포원(말단조직원)으로 몰렸다. 1948년 11월25일 군사재판에서 포고령 위반(공중질서 치안문란)으로 징역 20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갇혔다. 이씨도 심씨처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30일 대전 골령골에서 사살당했다.
앞서 박씨 등은 2021년 10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재심을 신청했고 법원은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감금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심을 지원한 이우경 여순민중항쟁전국연합회 사무총장은 “매주 화요일에 재심공판을 했던 상황에서 재판부가 일부러 여순사건 추념일에 선고공판을 열어 무죄를 선고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른 희생자 4명도 재심이 진행 중이다. 이들도 하루빨리 명예를 회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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