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한겨레>가 입수한 김기석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의 메모 내용.
“5·18 당시 보안사가 주도한 각종 ‘작전’이나 막후공작 여부 등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종배(64) 전 국회의원은 17일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지하실에서 박남선 상황실장과 내가 시민군들에게 총기를 지급한 뒤, 나도 한정 갖고 올라갔는데 공이가 빠져 있는 ‘빈총’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종배 전 국회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그는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기 전 시민군 쪽 소총과 폭약류의 뇌관이 제거돼 있었다는 사실을 군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알았다. 김 전 의원은 “이미 총을 갖고 있었던 시민군들 외에 일부는 빈총을 들고 있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17일 <한겨레>가 입수한 김기석(1931~2010)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소장)의 5월23일 메모엔, ‘도청 무기류 폭약 집결 감시, 학생 2명 포섭’이라고 적혀 있다. 도청 무기 실태는 ‘소총 1500~2000정, 수류탄 700여발, 폭발물 티엔티 300C/B, 뇌관 20000여개’로 기록돼 있다. 5월21~26일 계엄사와 학생수습위원회 사이에 진행된 ‘대화’나 ‘보고 내용’ 등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거점이었던 전남도청 안. 박지원 의원실 제공
김 전 의원은 “당시 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 김아무개가 의도적으로 공작에 의해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그가 (수습위원회 일원으로) 계엄사와 만나 입장을 들으며 무서워했을 것 아니냐?”며 “온건파는 처음부터 무기를 반납하자고 했고, 받아들일 수 없어 지도부에서 그들을 축출했었다”고 회고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상황실장으로 무장 시민군을 이끌었던 박남선씨. 정대하 기자
시민학생투쟁위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66)씨도 군이 적극적으로 ‘막후작전’을 펼쳤다고 보는 쪽이다. 그는 “‘오열’(간자)들이 침투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총기) 뇌관을 제거했다. 군 출신이 시민군 무기고에 들어온 것은 보안사와 협조하에 이뤄진 작전으로 본다”며 “만약 우리도 모르게 뇌관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군이 그렇게 쉽게 수많은 시민을 죽이면서 진압작전을 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실장은 “5월24일 밤에 (온건파 학생들을 축출한 뒤 시민학생투쟁위를 함께 만들었던) 윤상원(시민학생투쟁위 대변인·1950~1980)에게 설득당해 도청 밖에 있던 대학생 등을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며 “윤상원은 목소리에 상당히 힘이 있고 논리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의원도 “윤상원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지속해서 싸우기 위해서는 지도부를 다시 결성해야겠다고 판단해, 5월25일 저녁 와이더블유시에이에 있던 대학생 등 100여명이 도청으로 들어오도록 했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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