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광주광역시 남구청 9층 종합상황실에서 열린 ‘제40주년 5·18 남구포럼’ 참석자들이 5·18 학살사건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980년 5월21일 광주광역시 남구 송암동에서 계엄군에 의해 희생당한 후 사라진 광주시민들의 행방(<한겨레> 2019년 5월16일치 9면을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은 19일 광주광역시 남구청이 연 ‘제40주년 5·18 남구포럼’에서 ‘광주 항쟁 당시 송암동·효천역 학살사건’을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날 이재의 연구원이 <5월광주민중항쟁사료집>, 20사단 전투상보, 20사단 상황일지 등을 분석한 자료를 종합하면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한 후 외곽지역 봉쇄작전을 펼친다. 이날 밤 7시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자위권 보유 천명’을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자위권 보유’는 ‘발포명령’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시위대는 이날 낮 나주·영암·해남·목포지역으로 빠져나갔다가 밤 9시께 되돌아오던 길에 광주 남구 송암동 남선연탄공장 앞 도로에서 계엄군(20사단 61연대)에게 집중 사격을 당한다. 버스를 포함한 차량 4대가 총격을 받았고 버스 안에는 민간인 4명(추정)이 숨진 채 아침까지 방치돼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군은 이날 자정께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버스와 트럭 4대를 타고 남선연탄공장으로 향했다. 시민군은 버스 안 사망자 10여명을 확인했지만 계엄군의 사격 때문에 부상자만 데리고 철수했다. 해당 장소와 100m 떨어진 곳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김복동씨는 1995년 12월 검찰 조사에서 5월22일 아침 7시께 사망자 12명을 봤다고 진술했지만 20사단 전투상보에는 3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어 9명의 행방은 규명되지 않았다. 1996년 송암동 사건을 조사한 광주지검은 목격자 진술이 엇갈려 ‘양민학살 조사결과 보고’에 21일 사건을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의 연구원은 그밖에 5월22일 아침 6시 황남열씨 가족 등 4명, 같은 날 오전 9시 왕태경씨 등 4명, 22일 오후 김재진씨 가족 4명, 23일 오후 2시 배성진씨 등 2명도 계엄군에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24일에는 11공수여단이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전재수(당시 11), 방광범(12)군 등 2명을 사살했다. 이날 오후 1시30분께 전교사 교도대와의 오인사격사건 이후에는 민가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김승후(18), 권근립(24), 임병철(24), 박연옥(49·여)씨를 사살했다.
이재의 연구원은 “5월24일 송암동 학살사건은 목격자와 생존자가 다수 있어 비교적 잘 알려졌지만 21일 사건은 신군부의 은폐와 피해자 증언 부족으로 덜 조명받았다. 최소 9명이 사라진 21일 사건을 구체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원은 이어 “우리나라 사법부는 송암동 학살이 자위권 천명 이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이 계엄군의 정당방위에 의해 희생됐다고 결론지었다.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