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낮 12시 대구시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김규현 기자
17일 오전부터 경찰과 행정당국의 이례적인 대치 속에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이날 낮 12시부터 대구시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예정대로 진행됐다. 이날 오전 축제가 열리는 대구시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 대구시청·중구청 직원 500여명은 행정대집행을 위해 현장에 나왔다. 축제 주최 쪽이 대중교통전용지구의 도로 점용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대구경찰청은 이날 오전 7시부터 기동대 20개 중대 1300명, 교통경찰·일반 직원 200명 등 모두 1500명을 배치했다. 대구시가 시내버스 우회 조처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경찰이 일반 운전자들에게 우회 조처 등 교통 안내에 나서고, 시청·중구청의 행정대집행 예고와 축제 반대 집회와 충돌을 막기 위해서다.
대구시청 공무원들은 오전 9시25분께 행사 차량을 몸으로 막아서 30분여 동안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경찰과 행정당국의 대치는 행사 시작 직전인 낮 12시께 공무원들이 스스로 떠나면서 마무리됐다. 한 대구시 간부 공무원은 “경찰과 공무원이 마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귀띔했다.
17일 오전 대구시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대구시 공무원들이 대구퀴어문화축제 주최 쪽 무대 차량 진입을 위해 교통정리에 나선 경찰관들을 막으려고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때 대구시청 공무원들이 동성로상인회가 걸어 놓은 펼침막을 들고 길을 막아서자 시민들은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이들이 든 펼침막에는 ‘멋대로 대중교통 10시간 차단하는 대구퀴어(동성애)축제 강력히 반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대구시민 김아무개(51)씨는 “상인회가 길가에 붙여둔 펼침막을 어디서 떼어와서 공무원들이 들고 있었다. 본인들도 부끄러운지 나중에는 상인회 명의가 적힌 부분을 발로 밟아 숨겼다. 공무원들을 도열시킨 채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발언을 쏟아내는 홍준표 대구시장이 너무 부끄럽다”고 말했다. 오은지(52)씨도 “시장의 정치적인 계산으로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화난다. 대구시민이자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로서 엄청 불쾌하다”고 말했다.
축제를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되자 축제 참가자들은 “우리가 이겼다”, “대구경찰 멋지다”라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축제에 참석한 김선주(39)씨는 “행사 자체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경찰에서 안전하게 축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너무 고맙고, 날은 덥지만 이 공간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전북 군산에서 왔다는 성소수자부모모임 회원 정은애(60)씨는 “홍준표 대구시장과 혐오세력의 비이성적인 압력 덕분에 전국의 퀴어들과 지지자들이 분기탱천해 모였다. 대구퀴어축제가 어느 때보다 성황리에 치러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17일 낮 대구시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한 참가자가 ‘퀴어 대박’이라고 적힌 부적을 보여주고 있다. 김규현 기자
홍준표 대구시장은 이날 오전 현장을 찾아 “공무원 충돌까지 오게 한 대구경찰청장의 책임을 묻겠다. 경찰이 불법 도로 점거 시위를 보호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밀치고 버스 통행권을 제한했다. 법원은 집회·시위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판결했지, 점용 허가를 받지 않은 공공도로를 점거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수차례 협의했는데 법을 이렇게 해석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문재인 시대의 경찰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나 세상이 바뀌었다. 불법 집회가 난무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덧붙였다.
대구시는 퀴어문화축제를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대구시의 조처가 무리라는 반응이 나온다. 대구경찰청 공무원직장협의회는 이날 홍 시장의 발언에 대해 성명을 내어 “홍 시장은 집회 적법성과 별개로 도로점거는 불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집회신고 뒤 도로점용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에 대해 도로점거를 불법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법원 판례 등 일관된 태도다. 적법한 신고를 마친 집회를 열 때 도로점용허가를 받게 하는 것은 집회의 신고제를 허가제로 변질시켜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집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검사 출신으로 누구보다 법을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시는지 의문이다. 대구퀴어축제는 2009년 처음 개최된 뒤 15년간 동안 대체로 안전하게 관리되었다. 홍 시장은 더 이상 대구경찰의 명예와 자긍심에 상처 주지 마라”고 강조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17일 오전 대구시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 행정대집행하는 공무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경찰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퀴어 축제는 적법하게 신고 수리되어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도로점용허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행정대집행을 하는) 정당한 사유는 될 수 없다. 도로법 제74조 행정대집행의 적용 특례를 보면, 반복적이고 상습적으로 도로를 점용하거나 도로통행 및 안전확보 위해 신속하게 필요한 조처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행정대집행을 할 수 있는데,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했다. 중구청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전국공무원노조 대구지역본부 중구지부도 지난 16일 성명을 내어 “적법하게 신고된 집회를 막지 말라는 게 헌법과 법원의 판단이고 경찰도 시민 안전을 위해 교통통제를 하겠다는데 홍준표 대구시장만이 차별과 혐오의 말을 내뱉으며 몽니를 부리고 있다. 대구시는 행사장에 부스 등 시설이 설치되면 즉시 철거해 줄 것을 부구청장을 통해 중구청에 계속 압박했다. 공무원노조는 직원 강제 동원을 단호히 반대하며, 행정대집행 강행 시 공무원노조가 앞장서 막을 것”이라고 밝혔다.
배진교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행정수장을 만났을 때 시민이 겪는 기본권 침해와 안전의 위협 등 피해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대구시의 집회 방해, 행정대집행 권력 남용 등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무원노조 등의 성명은 뜻밖의 위로였고, 정말 큰 힘이 됐다. 홍준표 시장의 독단으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공무원들이 기본권을 침해하는 현장에 동원된 것에 굉장히 유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한편,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8일부터 자신의 페이스북에 수차례 퀴어축제를 반대한다는 글을 올렸다. 대구지법 민사20부(재판장 김광진)은 지난 15일 동성로상인회·대구기독교총연합회 등이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를 상대로 낸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바 있다.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 행사 안내. 제15회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 제공
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