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돈 부산시장(왼쪽)이 23일 오전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 직원 성추행 사실을 시인하고 사퇴한다는 뜻을 밝힌 뒤 회견장을 떠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오거돈 부산시장이 23일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시장 자리에서 사퇴했지만, 사퇴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사퇴하며 내놓은 입장문은 진정한 사과나 반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난해 불거졌던 미투 의혹까지 다시 조명되며 시청 안팎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도 나왔다.
오 시장과 피해자 쪽이 밝힌 내용을 종합하면, 오 시장은 부산에 첫번째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2월21일)한 뒤 부산시 공무원들이 비상근무를 하던 이달 초 수행비서를 통해 피해 여성 직원을 집무실로 불렀고 강제적인 신체접촉을 했다. 조직 상하관계 사이에서 이뤄진 전형적인 권력형 성추행인 셈이다. 이를 두고 오 시장은 이날 회견에서 “5분 정도의 짧은 면담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했다. 이것이 해서는 안 될 강제추행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경중에 관계없이 어떤 말로도, 어떤 행동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피해 직원은 이날 부산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낸 입장문에서 “그곳에서 발생한 일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한 성추행이었고, 법적 처벌을 받는 성범죄였다. ‘강제추행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경중에 관계없이’ 등의 표현으로 되레 제가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비칠까 두렵다”고 밝혔다. 또 이런 우려 때문에 입장문의 내용을 사전에 확인하겠다는 의견을 전했지만 오 시장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기자회견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갑작스레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내용이나 형식은 최소한의 성찰도 없었던 셈이다.
피해자는 이날 입장문에서 자신은 “여느 사람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며 “월급날과 휴가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평범’, ‘보통’이라는 말의 가치를 이제야 느낍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번 사건으로 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오 시장은 또 성추행 뒤 측근을 통해 피해자를 회유하고 목격자가 없다며 성추행 사실을 부인했다. 이달 말까지 사퇴하지 않으면 폭로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뒤에야 이날 사퇴를 선언했다.
오 시장의 과거 행적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부산성폭력상담소는 이날 성명을 내어 “오 시장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성희롱·성폭력 전담팀 구성을 미뤘던 모습이나 2018년 회식 자리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양옆에 앉힌 보도자료 등에서 (이번 사건은)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과 이를 성찰하지 않는 태도는 언제든지 성폭력 사건으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10월에도 오 시장은 미투 의혹이 불거졌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부산시청 광장 앞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장 근처에서 오 시장이 전 부산시청 여성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오 시장은 ‘가짜뉴스’라며, 해당 유튜브 진행자 3명을 상대로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부산시 한 직원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비슷한 추문에 연루돼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으면서 성추행을 저지를 수 있느냐. 정말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성폭력 사건 자체가 권력의 상하관계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제였다. 권력의 상하관계, 권위주의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라며 “이를 위해서도 가해자가 정확히 처벌받는 사례를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피해자 쪽은 사건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피해자는 입장문에서 “이번 사건과 총선 시기를 연관 지어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이 있다. 정치권의 어떠한 외압과 회유도 없었으며, 정치적 계산과도 전혀 무관함을 밝힌다. 부디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부산/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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