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00년 여름, 내 첫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 30대 중반이었으니 생물학적으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다만 소설가로 출발하기엔 때가 좀 일렀다.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이 글을 썼지만, 프로로서 훈련은 돼 있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방식으로 썼을 뿐, 소설적 ‘이야기’와도 거리가 멀었다. 고백건대, 소설적 이야기가 뭔지도 잘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꿈꿨으면서도, 꿈을 이룰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순전히 운이 좋았다는 얘기다.
이 행운은 피시(PC)통신과 함께 찾아왔다. 다룰 줄도 모르면서 무작정 컴퓨터를 샀고, 다루는 법을 익히자마자 하이텔 문학관 게시판에 ‘무작정’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천둥벌거숭이 시골 소녀의 성장기를 매일 한 꼭지씩, 꼬박꼬박. 미치도록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과연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
좋아해 주었다. 조회 수도 높았고, 다음 편을 기다려 주는 독자도 늘어났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게시했던 원고를, 이번에도 무작정 어느 출판사에 보냈다. 일주일 후엔 출간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자전적 성장소설이었던 <열한 살 정은이>는 행운과 ‘무작정’의 힘으로 세상에 나온 셈이다.
책을 내준 편집장은 내게 등단을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꾼 체질인 듯하니, 신춘문예보다는 문학상 공모전에 도전하라 했다. 장편으로 등단하는 방법조차 몰랐던 내겐 계시와도 같은 말이었다.
나는 또 무작정 덤볐다. 자신이 있었다. 도전하면 당연히 당선되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이. 그때만 해도 몰랐다. 내 소설이 예심도 통과하지 못할 줄은. 6년에 걸쳐 11번이나 떨어질 줄은. 글 잘 쓰는 사람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줄은. 내가 우물 안에서 떠들어대는 하찮은 개구리라는 사실도.
그래도 실패를 통해 얻은 것이 하나 있었다. 결코 ‘무작정’으로는 안 된다는 당연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살기 시작했다. 기초적인 문법부터 다시 공부했다. 뛰어난 작가들의 작품을 교본으로 삼아 이야기 만드는 법을 익혔다. 세상을 향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그사이에도 실패는 거듭됐으나 내 솜씨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예심을 통과하고, 본심을 통과해, 최종심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2007년 봄 어느 밤이었다. 세계일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 나는 욕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를 닦다가 아들이 가져온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계청소년문학상에 당선됐다고 했다. 한순간, 귀가 닫히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머릿속마저 껌껌해졌다.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빨간 고무장갑을 쥐어짜며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내 딸 잘했어, 라고. 내 인생에서 그토록 찬란했던 순간이 또 있었을까. 단언컨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등단작이자 두 번째 ‘첫 책’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정유정 작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년 후, 나는 다시 도전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등단만 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쓸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현실은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청소년소설 작가로 인식돼 있었다. 들어오는 청탁은 청소년소설뿐이었다. 원하는 이야기를 하려면, 그에 걸맞은 무대를 스스로 얻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렵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2009년, 나는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당선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내 세 번째 ‘첫 책’이 되었다. 마침내 세상이 내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자리를 내준 것이었다. 그 자리에 서면서, 세상이 요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욕망하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럴 수 있기를, 두려움 없이 갈 수 있기를 바랐다.
12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여전히 바란다. 죽는 날까지 그때의 마음이 꺾이지 않기를, 그리하여 진짜 꾼으로 남을 수 있기를.
정유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