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960년 6월호에 실린 김수영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발표본. “그놈”이라는 욕설과 “밑씻개”라는 말로 4·19 혁명의 흥분을 노래했다. 맹문재 제공
(※누가 읽을지 모르는 신문이라는 특성 때문에 욕설을 그대로 쓰지 않고 ×로 표시하오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2030년 국어 교과서에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실렸다고 치자. ‘시는 외워야 맛’이라는 신념을 가진 국어선생은 학생들에게 이 시를 외워오라는 숙제를 낸다. 다음날 학생들은 하나씩 일어나 힘차게 시를 외운다.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대강이나 빨아라…”. 어떤가. 기어이 외우라 할 텐가.
김수영의 시에는 비속어를 포함한 욕설이 난무한다. ‘그놈, 이놈, 어린놈, 지긋지긋한 놈, 추잡한 놈, 미친놈, 도적놈, 에미 없는 놈, 아들놈, 애놈, 심부름하는 놈’처럼 ‘놈’은 단골손님이고, ‘여편네, 새끼, 년, 자식, 무식쟁이, 개수작, 뒈지다, 씨부리다(씨불이다)’를 거쳐 급기야 ‘쌍욕’을 하는 데까지 이른다. 산문에서도 찻집에서 남녀가 음식을 시켜먹는 모습을 보며 “처먹고 있다”(‘시골 선물’)고 욕한다. ‘시에 욕설이 나오는 게 뭐가 문제냐?’라며 호기롭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식에 반한다.
욕설을 제목에 담은 김수영 시 ‘이놈이 무엇이지?-신귀거래 9’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그러기보다는 잘 알려진 ‘눈’이라는 시에서처럼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정도면 얼마나 안전하고 온건한가. “기침”과 “가래”같이 ‘불결하고 불순한 모든 것’, ‘가슴에 맺힌 울분’을 토해내버리자는 제안이면 안심이다. 말 중에서 ‘기침’과 ‘가래’와 닮은 건 역시 욕지거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기침을 하고 가래라도 뱉자는 권유는 ‘욕이라도 하자’ 정도의 부추김이겠지.
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그래서 그 말을 얌전히 듣고 감명을 받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시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을 직접 실행한다. “기침을 하자”(욕을 하자)는 꼬드김과 진짜로 욕을 내뱉는 행동은 꽃과 칼의 차이만큼 거리가 멀다.
시는 욕설에 대해 텃세가 심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욕설은 토속성과 민중성의 반영, 현장감 있는 인물 묘사, 서사적 진실과 사실성의 반영이라며 칭송한다. <임꺽정>이나 <장길산>, <태백산맥>, <혼불> 같은 소설에 걸판지게 등장하는 욕설은 소설을 빛나게 하는 미덕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발되는 욕설에는 리얼리티가 담긴다. 유독 시에 등장하는 욕설에 대해선 왜 이리 호들갑인가?
김수영 시 ‘말’ 육필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에서 “말의 자유”를 추구했다. 김현경 제공
욕설은 분노의 정서를 바탕으로 대상을 향해 ‘모욕, 비난, 저주’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퍼붓는 말이다. 분노의 순간에 치솟는 극단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고 상대방에게 격렬한 반발과 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불결하고 제어되지 않아 가장 야수적인 말이다. 상스럽고 불쾌하고, 해롭다.
말하는 사람도 피해를 본다. 친밀감의 표시일 때도 있지만, 품위 없고 막돼먹은 사람 취급당하기 쉽다. 그래서 욕설은 경멸의 대상이고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아이가 어른 앞에서 내뱉었다가는 혼쭐이 나고 어른도 비난과 처벌을 받기 일쑤다. 욕설에 대한 불안감은 겉보기에 고상해 보이는 담론의 질서가 일순간에 흐트러지고 별것 아닌 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한다. 무의식이 언어적이라고 한다면, 그 무의식의 토대가 욕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그만큼 욕설은 강력하고 불온하다.
그럼에도 욕은 인간의 본질 조건이다. 우리는 언제나 욕과 함께 살아왔다. 뇌 손상으로 말을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도 욕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기저귀에 싼 똥오줌, 불결한 냄새, 옷에 게운 젖, 밤새 이어지는 울음을 껴안아야지만 비로소 아이에 대한 사랑이 완성되는 것처럼, 언어도 욕이 있어야 완전해진다.
시는 이 강력한 무기를 내려놓았다. 시가 비유나 상징, 이미지를 통해 예술로서의 미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나태한 정신의 징후’이자 상상과 숙고를 몰수하고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욕설은 시와 어울리지 않는다.
김수영 시 ‘말’ 육필 초고 둘째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욕설 자체가 태생적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전혀 확보하지 않고 충돌하는 것이라면, 그 사이에 과속방지턱 같은 감속 장치라도 설치해야 한다. 굳이 욕설을 시에 들인다면, 별도의 감각적 이미지와 결합하여 대상을 달리 상상하도록 만드는 수사적 책략을 쓸 법도 하다.
그런데 김수영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김수영은 미적 가치를 갖도록 욕설을 전향시키지 않는다. 도리어 ‘미적 가치 추구’라는 시를 둘러싼 신화적 합의를 뒤엎어버린다. 욕설을 씀으로써 시를 폐지한다. 그게 김수영이 갖는 가치이다. 시를 시가 아니게 함으로써 시가 되게 하는.
그는 “적당한 감각적인 현대어를 삽입한 언어의 조탁이나 세련되어 보이는 이미지의 나열과 구성만으로 현대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산문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며, 무엇보다 ‘진정한 시’를 가려내는 게 시인들의 급선무라고 외친다. ‘진정한 시’는 “독자적인 방법”을 시도한 시(‘문단추천제 폐지론’)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시적 인식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각도의 발견”(‘시적 인식과 새로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독자적이고 새로운 발견은 추상에 있지 않다. 비루하고 옴짝달싹 못 하는 ‘생활’ 속에 숨어 있다.
그가 택한 “독자적인 방법” 중 하나는 시인의 입안에 습관처럼 맴도는 말을 머뭇거리지 않고 내뱉는 것이다. 그는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을 굳이 시에 도달시킴으로써 더 이상 시를 ‘아름다움’의 졸개로 만들지 않을 뿐이다. 그는 시의 범위를 확장시킨 게 아니다. 시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욕설의 도입은 ‘시어’와 ‘일상어’의 아름다운 동거라기보다는, ‘시어’의 포기, ‘시론’의 포기이다. 체면, 온전함, 그럴듯함의 포기이자, 추상에서 구체로의 진전이자 밀착이다. 그게 그가 버릇처럼 얘기하는 ‘새로움’, ‘온몸으로 쓰는 시’, ‘자유’, ‘사랑’, ‘생활’을 담는 시어들이다.
거기에 언어에 대한 그의 현대적 감각이 놓여 있다. 그는 자신이 써온 시어가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고, “서적어와 속어의 중간쯤 되는 말들”이라고 증언한다(‘시작 노트 2’).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글에서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어렸을 때 들은 말이 아름답다며 “마수걸이, 에누리, 부싯돌” 따위를 꼽는다. 하지만 이내 이를 철회한다. 아름다운 말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라는 것이다. 시라는 맥락 속에서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게 고유어든, 한자어든, 외래어든, 욕이든 뭐든 다 좋다.
언론의 자유도 혁명의 불꽃도 사그라들고, 모두가 속물이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시적 모험을 옹호하면서 온몸으로 자유의 모험을 감행한다. 여기서 자유는 “자유의 과잉”, “혼돈”을 만들어내는 자유다.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자유,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자유다.
<문학춘추> 1965년 2월호에 실린 김수영 시 ‘말’ 발표본. 맹문재 제공
욕설을 쓰면서도 그는 격앙되기보다는 차분하고 냉정하다. “나는 모리배들한테서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모리배’)고 말했듯이 그의 언어는 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그 생활은 안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이라,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갈” 뿐이다(‘생활’). 그러다 보니, 그는 “죽음의 질서”,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말’). 그래서 겉보기에 모순되는 “무언의 말, 무력한 말”과 욕설은 ‘진정한 시’를 향한 ‘발악’(몸부림)이라는 면에서 통한다.
내 언어의 절반, 내 감정의 절반, 나를 표명하는 수단의 절반인 욕. 그것을 누르고 웅얼거리거나 그럴듯한 말로 번역하지 않는 일. 그게 혁명을 넘어선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시의 모습이리라(‘일기초 2’, 1960. 6. 17). 김수영이 자신의 속물적인 근성조차도 피하지 않고 고백하는 산문정신을 붙들고 있었다면, 그리고 혁명의 실패와 반동의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유를 추구했다면, 그 자유는 말의 자유일 테고 따라서 자신의 시에 욕설을 등장시키는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시임에도 욕설을 쓴 게 아니라, 시라서 욕설을 쓴 거다. 욕이 없는 시는 도로아미타불이다, 개똥이다.
다시 묻는다. 욕설이 섞인 시를 외워 볼 텐가. 기어코 자유를 감행해 볼 텐가.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말
나무뿌리가 좀 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寒氣)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 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 버렸다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