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100년, 김수영] (25) 사랑
사랑의 다른 말이자
같은 말 ‘소음’
김수영 언어의 핵심
사랑·자유·혁명
역설과 반어 뒤얽혀
사랑의 다른 말이자
같은 말 ‘소음’
김수영 언어의 핵심
사랑·자유·혁명
역설과 반어 뒤얽혀
<현대문학> 1968년 8월호에 ‘풀’과 함께 유작으로 발표된 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 맹문재 제공
“나는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생활의 극복’, 1966. 4.
46살의 김수영은 새삼스레 ‘사랑의 학생’을 자처한다. 이 발언은 각별하다. 사랑의 가치와 방법은 김수영이 일찍부터 파고든 삶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 생활을 “진정하고 영원한 사랑을 얻”(‘내가 겪은 포로생활’)은 덕에 견뎠고, 35살 때의 일기에 “산다는 것 전체가 봉사”이며 “여기에서 비로소 생활이 발견되고 사랑이 완성된다”(1954. 11. 30.)고 썼다. 4·19 혁명이 좌절된 군부독재 치하에서 김수영은 사랑을, 인간이 유한한 삶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힘’으로 재인식한다. 그가 추구한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에서 힘=시의 원천은 사랑이다. 사랑은 상처와 결함의 인간이 지닌 무한의 에너지이자 능력이다. 사랑은 영역과 한계를 알지 못한다. 사랑을 배우는 동안 인간은 성장하고, 사회와 역사는 향상하며, 현재는 지금-여기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관통한다. “나의 전진”이 “세계사의 전진과 보조를 같이하”(‘시작 노트 2’)는 위대한 순간도 사랑이 없이는 한낱 자기도취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 김수영은 자신과 한국 사회의 과업이 ‘사랑의 일’임을 강조한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무허가 이발소’, 1968. 3.) <김수영의 문학: 김수영 전집 별권>(1973)을 편찬하면서 시인 황동규는 김수영 시의 복잡성이 언어 구조에 있음을 밝혔다. 김수영의 핵심 용어인 사랑, 자유, 혁명 등은 서로 얽혀 있어,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 의미를 갖는 이중성을 띤다는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한 단어 안에 그 단어의 역설과 반어, 차이가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김수영의 산문적 모험은 “딴 데서 불어오”는 ‘바람’(‘절망’)처럼 뜻밖의 동의어와 상호 규정의 목록이 된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다,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는 혼란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반복과 변화를 거듭하며 같은-다른 것이 계속 생성되는 연쇄작용, ‘변주’(變奏)다. 김수영의 표현으로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시여, 침을 뱉어라’)이다. 김수영은 이 변주/운동/이행의 무한행렬에 ‘사랑의 변주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유, 혼란, 혁명, 양심, 피로 등이 이 행렬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랑과 동떨어진 것을 사랑으로 만들고, 그 사랑을 다시 세상의 곳곳으로 동시에 미래로 이어나가는 방식. 어제 쓴 시와 방금 전의 자신과 결별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일은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현대문학> 1968년 8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 뒷부분. 맹문재 제공
김수영 시 ‘절망’ 육필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시와 비평> 2집(1956년 8월)에 발표된 김수영 시 ‘나의 가족’. 맹문재 제공
김수이 교수.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 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 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 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 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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