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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란 ‘사랑’ 대주제의 변주곡…‘소음’이 사랑으로 혁명으로

등록 2021-11-15 04:59수정 2021-11-15 09:26

[거대한 100년, 김수영] (25) 사랑
사랑의 다른 말이자
같은 말 ‘소음’
김수영 언어의 핵심
사랑·자유·혁명
역설과 반어 뒤얽혀
<현대문학> 1968년 8월호에 ‘풀’과 함께 유작으로 발표된 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 맹문재 제공
<현대문학> 1968년 8월호에 ‘풀’과 함께 유작으로 발표된 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 맹문재 제공

“나는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생활의 극복’, 1966. 4.


46살의 김수영은 새삼스레 ‘사랑의 학생’을 자처한다. 이 발언은 각별하다. 사랑의 가치와 방법은 김수영이 일찍부터 파고든 삶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 생활을 “진정하고 영원한 사랑을 얻”(‘내가 겪은 포로생활’)은 덕에 견뎠고, 35살 때의 일기에 “산다는 것 전체가 봉사”이며 “여기에서 비로소 생활이 발견되고 사랑이 완성된다”(1954. 11. 30.)고 썼다. 4·19 혁명이 좌절된 군부독재 치하에서 김수영은 사랑을, 인간이 유한한 삶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힘’으로 재인식한다. 그가 추구한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에서 힘=시의 원천은 사랑이다. 사랑은 상처와 결함의 인간이 지닌 무한의 에너지이자 능력이다. 사랑은 영역과 한계를 알지 못한다. 사랑을 배우는 동안 인간은 성장하고, 사회와 역사는 향상하며, 현재는 지금-여기에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관통한다. “나의 전진”이 “세계사의 전진과 보조를 같이하”(‘시작 노트 2’)는 위대한 순간도 사랑이 없이는 한낱 자기도취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 김수영은 자신과 한국 사회의 과업이 ‘사랑의 일’임을 강조한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무허가 이발소’, 1968. 3.)

<김수영의 문학: 김수영 전집 별권>(1973)을 편찬하면서 시인 황동규는 김수영 시의 복잡성이 언어 구조에 있음을 밝혔다. 김수영의 핵심 용어인 사랑, 자유, 혁명 등은 서로 얽혀 있어,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 의미를 갖는 이중성을 띤다는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한 단어 안에 그 단어의 역설과 반어, 차이가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김수영의 산문적 모험은 “딴 데서 불어오”는 ‘바람’(‘절망’)처럼 뜻밖의 동의어와 상호 규정의 목록이 된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다,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는 혼란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반복과 변화를 거듭하며 같은-다른 것이 계속 생성되는 연쇄작용, ‘변주’(變奏)다. 김수영의 표현으로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시여, 침을 뱉어라’)이다. 김수영은 이 변주/운동/이행의 무한행렬에 ‘사랑의 변주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유, 혼란, 혁명, 양심, 피로 등이 이 행렬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랑과 동떨어진 것을 사랑으로 만들고, 그 사랑을 다시 세상의 곳곳으로 동시에 미래로 이어나가는 방식. 어제 쓴 시와 방금 전의 자신과 결별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일은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lt;현대문학&gt; 1968년 8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 뒷부분. 맹문재 제공
<현대문학> 1968년 8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 뒷부분. 맹문재 제공

김수영의 열린 언어 우주에서 ‘사랑’의 다른-같은 말들 중 독특한 것은 ‘소음’이다. 소음은 그의 시 쓰기를 방해하면서도 고무하는 “사랑하는 적”(‘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근대화’의 병균에 오염”된 1950, 60년대의 서울은 소음의 도가니였다. 버스와 술집과 다방 등 도처에서 “라디오 가요의 독재적인 연주”(‘무허가 이발소’)가 울려 퍼지고, 김수영의 집 옆 철공장에서는 종일 땜질 소리가 들린다. 소음은 한국의 후진적인 현실만이 아닌, 문학과 자연과 존재 등 삶의 모든 차원에 있다. 김수영은 갖가지 소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는 소음을 사랑으로 듣고, 자신이 직접 사랑의 소음을 발성한다. 사랑을 배우는 일이란 곧 새로운 시를 쓰는 일이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소음의 반대가 아닌, 소음의 궁극으로서의 침묵을 듣는 일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권력과 자본의 소음에 지배당하던 대상에서,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시여, 침을 뱉어라’) 소음-사랑의 주체로 거듭나며, 자신이 이미 세상을 바꿀 혁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각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수영의 시 쓰기는 ‘사랑’의 대주제를 변주해 현실의 소음을 혁명의 침묵으로 빚어내고, 다시 자연과 존재의 근원적인 침묵을 향하는 끝없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 ‘사랑의 변주곡’에서 사랑의 음악은 혼란의 소음과 흡사하며,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시의 처음을 압도하는 것은 단호한 명령과 선언이다. 이 목소리는 욕망의 입에서 쏟아진 삶의 생음(生音)을 사랑의 음악으로 변주하려는 강렬한 결의를 전달한다. 인간의 본능인 ‘욕망’을, 타자를 향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사랑’으로 고양하는 비법은 ‘발견’의 행위다. 그런데 발견은 무한히 갱신되는 것이기에, 욕망을 사랑으로 변주하는 작업은 끝없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4·19 혁명에서 배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이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어두운 현실에서 사랑의 빛나는 현재를 계속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기술.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부패한 현실과 타락한 문명에 굴복했던 우리가 욕망에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약할 때, 그 사랑의 아슬아슬한 절도를 열렬히 유지할 때,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은 “소음과 광증(狂症)과 속도와 허위”(‘시골 선물’)의 도시에서 “사랑의 위대한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김수영 시 ‘절망’ 육필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절망’ 육필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그때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은,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는 것이다. 김수영이 시와 산문에서 자주 다룬 ‘라디오’는 독재정치, 현대문명, 일본과 북한 방송을 금지한 비극의 역사, 언론 규제, 문화의 후진성, 생활 등을 다양하게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의 변주곡의 첫 음으로 선택된 라디오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사랑이 없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라디오 소리에서 출발한 사랑의 변주곡은 침묵의 속삭임이 되어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고, 어느새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밀려닥친다. 사랑의 주파수에 맞추어진 세상은 지금 같은 에너지의 흐름 속에 있다.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강, 산, 기차, 숲, 방, 할머니, 심부름하는 놈, 봄베이, 뉴욕, 먼 날 등을 사랑의 장(場)으로 연결한다. 끊어짐을 뜻하는 ‘간단’(間斷)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양한 존재와 공간, 시간을 차별 없이 연결하는 ‘사랑의 운동’의 현장이 여기에 있다.

&lt;시와 비평&gt; 2집(1956년 8월)에 발표된 김수영 시 ‘나의 가족’. 맹문재 제공
<시와 비평> 2집(1956년 8월)에 발표된 김수영 시 ‘나의 가족’. 맹문재 제공

‘사랑의 변주곡’(1967)은 적잖은 시차를 두고 ‘나의 가족’(1954)과 대칭 구도를 이룬다. 두 시는 사랑을 운동의 에너지이자 흐름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공통점 또한 지닌다. ‘나의 가족’에서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사랑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은 집안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김수영에게는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행복을 선사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가족들이 밖에서 묻혀온 사랑의 기운을 누리는 수혜자의 위치에 있는 반면, ‘사랑의 변주곡’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사랑의 에너지를 세상에 퍼뜨리는 적극적인 존재로 성장해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여전히 암흑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의 현재는 지나간 혁명과 다가올 혁명 사이에서 누군가 홀로 깨어 사랑을 배우며 성장하는 시간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혁명을 꿈꾸는 밤의 현재에 ‘사랑’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공간의 제약 없이 흐른다. 시간의 차원에서는 온전히 아들의 몫으로 남겨진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의 미래를 ‘씨’의 형태로 예비한다.

시 ‘현대식 교량’(1964)에서 김수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20년 전 이야기”라며 무시하는 젊은이들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잊히고 부정당하는 시간을, 경이로움 속에 즐거이, 미래 세대가 자라는 사랑의 현재에 헌납한다. 알다시피 그는 자신의 ‘욕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상당 부분 거침없이 글로 썼다.

김수이 교수.
김수이 교수.

김수영의 욕망의 말들은 특히 여성과 관련한 문제에서 ‘사랑’과 거리가 먼 파동을 일으킨다. 이 문제와 관련해 김수영은 자신의 문학이 부정당할 새로운 시간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욕망의 주체와 욕망의 입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주체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는 김수영을 통해 곤혹스럽게 마주하는 인간의 모순이자 문학의 난제이다.

김수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 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 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 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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