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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의 유습, 사라지지 않았다

등록 2021-11-26 04:59수정 2021-11-26 20:10

[한겨레Book]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노예의 역사: 현대판 노예노동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l 예지(2015)

모든 기술은 인간 상상력의 결과이지만, 인간은 기술적 상상력을 만물의 지배원리로 삼아 거꾸로 인간에게도 적용해 왔다.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게 되자 인간을 가축처럼 취급하는 노예제도가 발명되었다.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고 아프리카인들이 납치돼 신세계로 팔려가기 전까지 지중해 세계에서는 슬라브족이 주요 희생자였다. 노예제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slavery’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슬라브인들은 로마인,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바이킹, 타타르족에게 붙잡혀 노예로 수출되었고, 아랍의 상인들에게도 수지맞는 상품이었다. 아랍의 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매입해 북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인도 서부에 팔았다.

물론 오늘날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가 1962년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노예제’의 유습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 제도는 가축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노예제는 현대문명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대추야자 열매에 코코넛 가루를 묻힌 아랍의 전통 가정식 디저트를 ‘라스 알압드’(ras al abd)라고 하는데, 레바논 한 제과업체에서 마시멜로에 초콜릿을 코팅한 현대식 과자로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이 제품명 역시 ‘라스 알압드’였다. 아랍어로 노예·하인을 ‘아비드’(Abeed) 또는 ‘알압드’(al-abd)라고 한다. ‘라스 알압드’는 ‘노예의 머리’란 뜻이다. 검정색(black)으로 봉긋 솟은 모양이 흑인(노예)의 머리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이후 인종차별적이란 비판을 받아 상품명이 변경되었다.

노예제 유습은 과자 이름에만 남은 것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카팔라’(Kafala)라고 불리는 중동 여러 국가의 악명 높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근로계약제도에 남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국인 노동자 비율은 38%에 달한다. 특히 식당·카페 종업원 등 서비스업 종사자 가운데 비중은 85%에 이른다. 쿠웨이트 가정 10곳 중 9곳이 가정부를 두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가나, 에티오피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출신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고용주는 외국인 노동자의 거주 비자 발급에 대한 보증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고용 기간, 처우는 물론 이직, 이사, 출국 등을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들 국가에선 임금체불이나 가혹한 노동조건, 성 착취를 비롯한 학대사건이 일어나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현대판 노예’ 제도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계속되어 왔다.

지난 2019년 영국 <비비시>(BBC)는 잠입취재를 통해 이들 지역에서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등의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한 가정부 온라인 불법매매 마켓을 확인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국가에서는 한국의 당근마켓 같은 앱, ‘포세일(4Sale)’을 이용해 가정부를 인종, 출신국가 등 카테고리 별로 분류해 주인의 취향에 맞게 선별 채용(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시장에 나온 가정부의 전 고용주(주인)들은 상품평을 하듯 이들을 품평한다. 방송 이후 쿠웨이트 정부는 이 앱에서 가정부 매매 섹션을 삭제했다.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의 첨단 상상력이 만든 노예시장이었던 셈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21년 3월, 카팔라 제도를 폐지했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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