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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론사회학 구축, 베버주의자의 꿈

등록 2021-12-17 04:59수정 2021-12-17 19:37

[한겨레Book] 나의 첫 책 - 김덕영

해적판서 갈급함 달래다 독일로
교수 자격 취득 무렵 세운 원칙
저술·번역 조화로운 결합 추구
‘어린시절의 죄’ 계속 지을밖에

내가 쓰거나 옮긴 책을 돌아본다는 것은–독일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어린 시절의 죄’(Jugendsünde)를 고백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보면 볼수록 잘못된 점, 허술한 점, 논리적으로 허약한 점 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적 생산의 전성기를 구가해야 할 나이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더더욱 남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이 난무하고 학생들이 끌려가던 대학 시절에 그 암울하고 엄혹한 현실을 외면한 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회학 이론과 씨름하느라고 헉헉댔다. “서구 이론을 극복하라”, “매판 지식인이 되지 마라”, “상아탑주의에 머무르지 마라” 등과 같이 준엄한 질책을 들으면 몹시 부끄럽고 숙연해졌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저 사회학 이론과 그 방법론적 토대가 되는 철학이나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갈급함을 달래느라고 정신없이 이 학과 저 학과 강의실을 기웃거리고 해적판 원서를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졸업과 동시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 목표는 단 하나, 막스 베버에 대한 멋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박사학위는 취득했지만, 공부가 너무 일천했다. 그래서 대학교수 자격(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큰 행운과 여러 사람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회학자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사회학자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나는 대학교수 자격 취득이 끝나갈 무렵 어렴풋하지만 향후 지적 생산에 대한 두 가지 작은 원칙을 세웠다. 그 하나는 번역과 저술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론, 경험, 역사, 비교연구, 방법론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보다 늦게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지적 훈련과정을 마치고 나니, 남은 것이라곤 몇 단계의 학위와 그에 상응하는 몇 편의 큰 논문 그리고 작은 논문 서너 개가 전부였다. 그것도 독일어로 된 것이었다. 조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 이름 석 자로 된 한국어 책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나의 첫 책이 <현대의 현상학: 게오르그 짐멜 연구>(나남, 1999)였다. 책이라기보다는 팸플릿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논문 몇 편밖에 안 되는 분량의 글을 책이라고 내민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 후 꾸준히 저서와 번역서를 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책은 2007년에 나온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길)였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첫 저술이다. 그러니까 저술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첫 책을 낸 셈이다. 그리고 2010년에 나온 막스 베버 번역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에서야 비로소 번역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첫 번역서이다. 번역은 고전 중의 고전을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완벽한 한글화를 이루는 일련의 지적-정신적 과정이다. 그리고 번역은 단순히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납덩이를 삼키고 평생을 살아가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게오르크 지멜(짐멜) 관련 책은 그의 지적 세계 전반을 조망하려는 목적으로 쓴 저작으로, 개론서를 겸하고 있다. 이는 다시금 이론사회학을 구축하려는 나의 작은 지적 기획의 일환이다. 베버 번역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권의 책과 더불어 나는 대학교수 자격 취득이 끝나갈 무렵 세운 지적 생산에 대한 두 가지 작은 원칙 가운데 하나인 번역과 저술의 조화로운 결합을 어설프게나마 실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둘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크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이 나온 후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이론, 경험, 역사, 비교연구, 방법론을 포괄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경험연구를 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제도적 자원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두 번 시도해보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이따금씩 내가 이러려고 사회학자가 되었는지 자괴감이 들곤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베버와 지멜 번역, 이론사회학 구축, 한국의 근대화와 근대성에 대한 역사적-비교적 연구에 전념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의 죄’를 저지르는 일은 아마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사회학자

그리고 다른 책들

<막스 베버>(길, 2012)

자칭 ‘치유할 수 없는 베버주의자’인 내가 추진해온 베버 연구의 일차적 중간결산으로, 이 시대의 진정 큰 정신인 베버의 지적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하고 통합과학적 인식의 패러다임을 찾아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책의 중심에는 국가, 관료제, 종교, 자본주의 등과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개체들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문화과학적-사회과학적 인식의 토대와 건축술에 대한 논의가 서 있다.

<환원근대>(길, 2014)

이 책은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근대성을 규명하려는 기획의 총론으로, 산업화 및 경제성장으로 환원되고 국가와 재벌로 환원된 근대화 과정을 역사적 측면과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이에 기반하여 환원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국가 이성 비판>(2016),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한 신학과 사회학>(2017), <한국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연구>(2019)는 이 책의 각론들이다.

<사회의 사회학>(길, 2016)

나는 베버주의자이지만 베버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의 지적 세계는 사회학 이론이라는 생태계의 일부이다.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사회학 이론을 구축하려면, 베버 이외의 중요한 사회학적 패러다임들도 역사적-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기획의 총론으로, 베버를 비롯해 12명의 거장을 다섯 개의 범주로 나누어 검토하고 있다. 앞으로 각각의 거장에 대한 각론을 써 나갈 것이다.

<막스 베버 선집> 제1-2권(길, 2021)

베버 서거 100주년(2020)을 맞이하여 기획한 ‘막스 베버 선집’ 총 10권 중 첫 번째로 나온 두 권으로, 베버 방법론과 관련된 논문들을 모두 모아 완역했다. 베버 방법론은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게다가 기존의 인식론, 논리학,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지성사적 관점에서 갖는 의의도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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