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이영석 지음 l 푸른역사(2020) ‘신’(神)이라는 보편 질서의 상징이 힘을 잃고 사라진 뒤, 세계는 한동안 역사를 믿었다. 압제자의 법정에서 혁명가들은 비록 지금은 유죄를 선고받더라도 역사의 법정에선 무죄라고 외쳤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는 더 이상 심판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기록이란 비판을 전복시키기 위해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역사에 몫 없던 자들의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오늘날의 우리들은 더 이상 역사를 믿지 않고,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한 역사가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는 최근까지 광주대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번역과 집필, 강연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최근 급작스럽게 작고한 서양사학자 이영석 선생이다. 그가 생애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펴낸 책이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이다. 이 책은 그간 학술적 글쓰기에만 전념해온 한 역사학자가 생애의 새로운 주기를 맞이하면서 맞닥뜨린 코로나 시대를 성찰하며 남긴 단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어째서 역사가의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나는 유신시대에 학교를 졸업하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주위의 동료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 부담을 덜기 위해서는 학문 자체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의 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스승이 존재하지만, 내가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까닭 중 하나였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스승이기에 그의 숨결이나 체취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은 없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책을 통한 것이 먼저였다. 나는 그가 펴낸 책을 읽고 서양근현대사, 특히 영국사에 대해 이 정도 깊이로 연구한 국내학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심지어 감동을 받았다. 이후 그가 펴낸 책 대부분을 구해서 읽었다. 그렇더라도 만약에 그가 정년을 앞두고 새롭게 소셜미디어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필담을 나눌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 공부하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염치불구하고 선생에게 종종 여쭙곤 했다. 가령, 대중문화연구 영역에서 매슈 아널드와 리비스 등을 엘리트주의로 비판하지만, 정작 19~20세기 영국의 엘리트들이 어떤 문화와 교육을 누렸는지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서 아쉬운데 이와 관련한 문헌들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은 <영국 제국의 초상>을 비롯해 몇 권의 책을 추천하고, 메일을 통해 자료를 보내주면서 “지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서양사 연구 추세가 사회사 위주로 흘러가다 보니 정치사와 지배층에 대한 연구가 다소 소홀했다”는 안타까움을 피력하기도 했다.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 그는 어떤 성찰을 했을까? 그는 우선 “‘더러운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선결과제”라면서 이를 위해 교육부터 시민운동까지 사회 전 부문에 이와 같은 움직임이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석 선생은 역사란 과거를 성찰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는 일이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보고 가장 깊은 수렁에서 내일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몸소 보여주고 떠난 스승이었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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