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탄생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l 책과함께(2019)
1945년 9월8일, 해방을 맞이한 경성역(서울역) 수화물 창고에는 일제 패망 직후 버려진 화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화물을 정리하던 인부들은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를 발견했다. 그 화물은 원고지 2만6500여장 분량의 종이뭉치였다. 때마침 인부들이 폐기하려던 화물을 발견한 역장은 며칠 전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날 조선어학회가 멸실될 위기에서 회수한 원고는 ‘조선어학회 사건’ 증거물로 3년 전 압수됐던 ‘조선어사전’ 원고였다.
일제는 중일전쟁 직후인 1938년부터 한글 잡지를 폐간하는 한편, 조선어교육을 폐지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본격화했다. 이때 발생한 사건이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함흥영생고등여학교 4학년생 박영희의 일기장에서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께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구절을 발견한 일제 경찰은 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 소속 교사 정태진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끝에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사건으로 최현배·이극로·이희승 등 33명의 한글학자가 검거되었고, 이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1929년부터 시작해 1947년 10월9일, <조선말 큰 사전>(첫째 권) 발간으로 결실을 맺기까지 사전편찬사업은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우리말의 탄생>은 부제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가 말해주듯 구한말 근대와 더불어 시작한 우리말에 대한 자의식이 국어사전 발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분단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남북한의 언어 이질화 현상이 심각해져 갔고, 1989년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사전’ 편찬에 합의한 것을 시초로 2004년부터 “민족의 언어유산을 집대성하고 남북의 언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 <겨레말 큰 사전> 사업이 시작되었다.
<겨레말 큰 사전> 사업은 문법 규정 등에 관한 세부적 합의를 비롯해 남북관계 경색 등으로 난항을 겪었지만, 현재까지 4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80% 정도의 진척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최근 또 다른 어려움에 처했다. 지난 4월 임기가 끝난 염무웅 전 이사장의 후임으로 편찬사업회가 세 명의 후보를 추천했지만, 대통령실에서는 굳이 탈북민 출신의 조명철 전 국회의원을 이사장으로 내정했기 때문이다. 북쪽과 협의가 필요한 사업의 남쪽 대표로 굳이 조 전 의원을 앞세워야 할 필요가 있는지 편찬사업회는 물론 통일부 내부에서조차 당혹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정 절차의 불투명성도 문제지만, 이렇게 결정한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해방 전후 시기에도 전 민족적 지지를 받는 대중조직으로는 조선어학회가 거의 유일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훗날 이승만 정부의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은 학도호국단을 창설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할 만큼 극우적 민족주의자였고, 안재홍은 중도적 민족주의자, 이극로·이만규 등은 진보적 성향의 민족주의자였다. 이처럼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지닌 인물들이었지만, 이들은 조선어사전의 완성과 우리말 교육의 확립이라는 대의를 우선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이 근대민족국가의 탄생을 준비했다면 <겨레말 큰 사전> 사업은 평화통일의 초석을 쌓는 일이다. 이 길에 굳이 걸림돌이 되려 하는가.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