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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상에 걷어차인 것들이 어깨를 맞댄 곳 [책&생각]

등록 2022-10-28 05:00수정 2022-10-28 17:16

우리 책방은요│풀무질

풀무질 내부
풀무질 내부

“어떤 존재도 소외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공간. 무한 경쟁의 도심 속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세상에 걷어차인 온갖 소외된 것들이 굴러들어 와 여기서 안식을 취하고, 그렇게 사회에서 소홀하게 다뤄진 가치들을 오롯이 품고 보듬는 공간.”

풀무질은 ‘독립책방'도 아니고 ‘대형책방'도 아닌 그 어중간한 어딘가에 있다. 독립책방이라는 단어에 드리워진 이미지는 작고 아담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인 독립 서적들이거나 여기 아니면 찾기 힘든 책들을 파는 그런 곳 아닌지. 그에 비해 우리는 공간도 널찍하고 독립 서적도 잘 들여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책은 다 들여온다는 얘기는 또 아니다. 대형서점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굳이 콕 집어 말하면 ‘우리 멋대로' 들여온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책방이라 하나 뭔들 ‘인문사회과학'에 들어가지 않을까. 결국은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을 들여오고, 우리가 ‘귀하다' 생각하는 것을 선보이고, 소개하는 거로 만족한다.

풀무질은 세상에 걷어차인 온갖 것이 잔류하고 남아있는 책방이다. 소형과 중형 가운데에 모호하게 끼어서 낡은 책과 새로운 책이 한데 뒤섞여 있다. 인문사회과학은 자본주의에 걷어차였고, 그중에서도 노동이니 여성이니 환경이니 하는 분야들은 경제, 경영, 자격증에 걷어차였다. 떠밀려서, 혹은 연대하다 보니 여기에 뭉친 아련한 존재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공간이다.

풀무질 내부
풀무질 내부

피가 튀기는 치열한 시장에서 너무 낭만적으로, 한편으론 자기만족적으로 꾸려나가는 책방이다. ‘풀무질’이라는 이름의 서점이 처음 문을 연 1985년부터 그랬다.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의 아지트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타협하고, 고민하며 ‘팔릴 만한 것'을 들여올 때도 물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우리의 기조를 유지하는 건 우리의 취향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러져 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닦는다. 그 반짝임은 분명 누군가에게 필요한 반짝임임을 믿는다. 언젠가 필요한 이에게 발견되는 순간 바로 그 사람에게 눈부심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우리는 각자의 찰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 모두에게 예비된 특별한 순간들을 모아놓는 사람들이다 .

나는, 풀무질은 은근히 타오르고 싶다. 오래오래 따뜻하고 싶다. 초반에 풀무질은 ‘불씨를 나른다’는 표현을 썼다. 지금 우리가 다섯 번째로 불씨를 넘겨받았다. 까딱하면 사그라질 불씨라 온몸으로 품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들까지 품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세상이라 다들 법석이지만, 그 와중에 밑에 깔리는 무언가를 밝히고, 감싸고 싶어서 이러고 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어쩌면 그냥 여길 떠나서 각자 살길 찾는 게 빠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다들 떠나지 못하고 있다. 책방으로 도서 출판계의 거상을 꿈꾸고 그런 건 없다. 풀무질 들어온 계기도 그냥 이게 없어지지 않길 바랐던 거고, 지금도 마을 한쪽에 자리 잡고 오래 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 책의 흐름이, 책을 통해 이어지는 사람 사이의 흐름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월이 갈수록 마음이 가늘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아직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걸 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나도 계속 걷는다. 먼 길을 걷겠지만 같이 걸으면 덜 힘들다. 오늘 좀 느리게 걸었다고 해서 내일 뛴답시고 허둥대지 말자. 어쨌든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책방을 운영하다 보면 책을 추천할 일이 많다. 매주 올리는 ‘이주의 책'도 어느새 100권을 넘겼다. (풀무질에서는 매주 책을 한 권씩 소개한다. 그간의 추천 책을 모아보려면 인스타그램에서 ‘#풀무질책추천’을 검색해도 좋고, 풀무질 누리집 https://poolmoojil.com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이 책방 전체가 하나의 큐레이션인데. 세상이 봐주지 않던, 모른 척하던 모든 것이 여기에 가지런히 모여있는데. 여기서 소중하지 않은 책이란 하나도 없는데. 풀무질의 더 깊은 곳으로 안내하기 위한 물꼬라고 자신을 설득해도 마음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남고 싶고, 살아남아야 한다. 세상을 향해 너희가 틀렸다고, 우리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외치고 싶다. 악당처럼 끈질기게 남고 싶다. 명륜동 지하에 모인 모든 생각과 글들이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풀무질이 지하에 있는 이유는 결국 세상의 뿌리가 여기 모인 책들에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김치현 풀무질 책방지기

풀무질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19 지하

https://www.instagram.com/poolmoojil
https://poolmooj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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