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작가. 탄자니아 응고롱고로 국립공원. ©이지유. 창비 제공
나의 첫 책 │ 동화작가·소설가 이현
드라마틱한 사연 같은 건 없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 글짓기로 꽤 칭찬을 듣던 어린이였다. 자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딴에는 꽤 자신 있는 마음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래저래 사는 일에 쫓겨 다니느라 막상 어른이 된 다음에는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 있을 겨를이 없었다. 아니, 겨를이라는 것이야 원래 마음에 달려 있는 법이니, 그럴 마음을 먹지 못했다는 편이 맞겠다. 그러다 서른하고도 중반을 넘어선 어느 밤, 문득 작정이 섰다. 더는 미루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침내 내가 쓰려던 것은 소설이었다. 어린이문학은 고민의 대상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고, 단편소설로 전태일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동화를? 그동안 수없이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 운명인 듯 우연인 듯 당시의 나를 찾아온 일들을 얘기하곤 하는데, 짧은 지면에 그럴 순 없고… 하며 고심하다 보니 결국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열렬한 어린이 독자였다. 외로운 마음에 찾아온 사랑은 열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유년의 마음은 본디 외롭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야 어린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어른보다 적지만, 심리적으로는 `외따로운' 섬이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은 마음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유년은 없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유년은 잘 모른다. 내가 못난 게 아니라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아직 잘 모른다. 유년의 마음은 홀로 서럽고 홀로 두렵다. 그런데 이야기에는 그런 마음들이 다 있었다.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인데 그 속에 담긴 마음은 꼭 내 마음 같았다. 나는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조차 모르는 내 마음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와 함께하는 나는 외롭지 않았다. 조금 서러워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어린 마음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에게, 성이라는 난해한 세계의 문 앞에서 당황하는 마음에게, 자꾸만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마음에게, 우정 같은 건 무력하기만 한 현실을 알아버린 마음에게, 어린 나를 외롭게 했던 마음들에게 들려주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엮어 나의 첫 책 <짜장면 불어요>를 출간하게 되었다.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공모에 당선되어서 고맙게도 큰 박수를 받으며 첫 책을 냈다.
하지만 우려 섞인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읽기에 무겁고, 어둡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더러 어린이 독자들에게도 반발 섞인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아산테 아저씨는 왜 죽였어요? 어째서 동구는 재능이 부족한 선수인가요? 결국 아무도 로봇의 별에 가지 못했잖아요! 최근에 출간한 청소년소설 <호수의 일>을 읽은 청소년 독자님들도 물어왔다. 둘이 잘 되게 해줄 수는 없었나요?
이현 작가의 첫 책 <짜장면 불어요>. 창비 주관 제10회 ‘좋은 어린이책' 창작 부문 대상 수상작. 윤정주 그림. 2006년 출간.
그러면 나는 어린 독자들에게 되묻곤 한다. 인생 경험이 십년이 넘으실 텐데, 살아보니 어떤가요? 쉽던가요? 그러면 어린 독자님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젓는다. 고등학생도, 중학생도, 오학년도, 도서관에서 만난 일곱 살 독자님도 그런 적 있다. 어린 독자님들도 실은 이미 알고 있다. 용기만으로 안 되는 현실이 있다는 것도, 사랑하는 마음이 반드시 보답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뿐, 우리 모두 태어나던 날부터 만만찮은 인생을 장하게도 살아내고 있다. <짜장면 불어요>의 표제작 ‘짜장면 불어요’의 기삼이 말마따나 “나는 내가 너무 좋아!”라 자찬할 만하다. 살아간다는 일이, 처음부터 내내.
그러니 어린 독자들을 향한 나의 문학은 만만찮은 나날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학이란 무릇 사실은 아닐지나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어린 독자들은 그 누구보다 진실에 대한 열렬한 마음을 품은 이들이므로.
그렇게 썼다, 나의 첫 책. 앞으로 그렇게 써나갈 것이다.
동화작가·소설가
푸른 사자 와니니(오윤화 그림, 창비, 2015)
이삿짐을 싸다 심심해서 TV를 틀었던 게 시작이었다. 암사자 무리가 버펄로를 사냥하는 장면에 나는 그만 할 일을 다 잊고 빠져들었다. 암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남들도 나도 고개를 저었다. 취재부터 걱정이었고, 호랑이도 아닌 사자가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사자에 반해 버린 터였다.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5권, 어린이 독자들이 기다려주는 덕분에 10권까지 달려볼 예정이다.
플레이볼(최민호 그림, 한겨레아이들, 2016)
나는 최동원 선수의 경기를 직관한 적이 있다! 고교 야구 선수들 기록을 줄줄 외웠고, 라디오로 프로야구 중계를 듣다 교무실로 끌려가기도 했다. 야구 이야기는 예정된 운명 같은 마음이었고, 당연히 그 배경은 부산이어야 했다. 그렇게, 구천초 야구부 주장 한동구. 야구를 사랑하는 만큼 야구를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동구 이야기, 어쩌면 나의 이야기.
1945, 철원(창비, 2012)
1945년 8월15일 정오, 철원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의 그날과는 좀 다른 해방이었다. 철원은 38선 이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그 지독한 5년을 겪으며 옛 철원은 폐허로 사라졌다. 그런데 오직 한 건물만 살아남았다. 조선노동당 철원군당사. 해방의 기운으로 지어져 전쟁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곳의 이야기다.
호수의 일(창비, 2022)
그러고 보면 나의 이야기는 모두 슬픔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무너진 희망을 증언하는 노동당사도, 잘 지는 법을 배우려 안간힘을 쓰는 동구도, 힘든 날이 다시 오리라는 걸 알아 버린 사자도, 그리고 얼어붙은 호수처럼 마음을 닫아 버린 열일곱 호정도. 그런 슬픔들이, 다시금 생각해도, 참 귀하다. 이제는 귀하다 말할 수 있게 된 나의 슬픔들로 썼다. 아직 깊은 슬픔에 홀로 잠긴 마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