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억울한 일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일어난다 [책&생각]

등록 2023-04-28 05:00수정 2023-04-28 10:14

어떤 호소의 말들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최은숙 지음 l 창비(2022)

요즘 나는 우울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답답한 심경이다. 우울증 상태에서 본 영화 <다음 소희>는 마음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다음 소희>는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대기업이고 좋은 직장이라는 학교 추천을 받아 찾아간 모 통신업체 콜센터에서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소희는 극심한 감정노동에 시달리지만 회사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대부분 실업계 고교의 현장실습생들로 채워진 회사는 오로지 실적만 따질 뿐이었다. 현장실습을 나가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밝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희였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노동자성을 갈아 넣고도 현장실습생이란 이유만으로 정당한 급여조차 받을 수 없었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 똑같이 답답한 현실뿐이었다. 결국 소희의 선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영화에선 한 형사가 소희의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스러운 수사의 순례를 시작한다. 형사는 해당 기업과 학교, 교육청까지 찾아다니며 그 죽음의 원인에 대해 따져 묻지만, 모두가 경쟁과 실적의 노예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 그 누구도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육청에서 만난 한 장학사는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벽면에 붙어 있는 각 학교의 취업실적표를 보여준다. 분노한 형사 앞에서 장학사는 “적당히 합시다. 일개 도교육청의 장학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2002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해 온 최은숙의 책 <어떤 호소의 말들>은 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인권위 활동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써내려간 다정한 책이다. 직업적으로 “억울합니다.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 쓴 책은 이외에도 많다. 정의감을 불사른 검사가 쓴 책도 있고, 변호사가 쓴 책들도 있지만, 이 책과 구분되는 결정적인 지점은 이 책을 읽고 나면 어쩐지 ‘인권위 조사관도 노동자’란 마음이 든다는 거다. 책 속에서 저자는 2011년 조사관들이 인권위 앞에서 벌였던 1인 시위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 나라는 인권위 조사관들조차 인권과 노동권을 침해당하는 나라다.

억울한 일은 당할 때도 차별적이지만 문제 해결 과정에도 발생한다. 경찰, 검찰, 법원을 비롯한 민원처리기관이 사용하는 어려운 법률용어들은 자신의 언어로 억울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높은 문턱이 된다. 영화 속 소희는 일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청년이었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도 회사에서 당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 말할 수 없었고, 항의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었기에 그는 영화에서 ‘말’ 대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춤’으로 유서를 썼다.

2022년 1월27일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지만, 그마저도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전체 노동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2021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38.4%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죽었다. 국가인권위 조사관 최은숙은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노동자로 산다는 점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얼마나 타당하고 당연한 일인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노동자로서, 납세자로서, 시민으로서 대응하는 기술을 의무교육으로 배울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황해문화> 편집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나훈아, ‘왼쪽 발언’ 비판에 “어른이 얘기하는데 XX들 하고 있어” 1.

나훈아, ‘왼쪽 발언’ 비판에 “어른이 얘기하는데 XX들 하고 있어”

나훈아 “용산 어느 쪽이고, 우짜면 좋노”…내란 나흘 뒤 공연서 언급 2.

나훈아 “용산 어느 쪽이고, 우짜면 좋노”…내란 나흘 뒤 공연서 언급

데뷔 10년 김환희 “오늘이 마지막 무대라는 마음으로 연기” 3.

데뷔 10년 김환희 “오늘이 마지막 무대라는 마음으로 연기”

90살 이순재 KBS 연기대상…“평생 신세 지고 도움 받았다” 4.

90살 이순재 KBS 연기대상…“평생 신세 지고 도움 받았다”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5.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