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정 지음 l 푸른역사(2023) 얼마 전 우연히 한국방송(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대한민국은 우주강국이다’를 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조선시대 천문학의 발달을 살펴보고, 동시에 다누리호와 누리호 발사 성공의 의미를 되짚어보았다. 특히, ‘천문강국 조선의 디엔에이(DNA)’가 21세기로 계승되어 우주기술을 선도하는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메시지가 인상깊었다. 15세기 조선에서는 세종의 주도로 20여 종의 천문의기가 개발되는 일종의 기술 ‘혁신’이 일어났는데,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 견주어 압도적인 숫자였다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기술이 도래하기 전, 전통 과학기술의 역사는 어떻게 서술되어야 할까? 역사의 서술이라는 것이 발생한 사건을 시간 순으로 써 내려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과학기술의 역사에는 ‘무엇’을 주요한 과학기술적 사건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입장차가 있다. 전통적으로 과학기술사는 유럽의 코페르니쿠스나 뉴턴과 같은 몇몇 위대한 인물들이 이끈 지성사적 성취가 인식의 대전환을 이뤘다는 과학‘혁명’의 역사로 쓰여 왔다. 과학사학자 이정의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는 조선시대 제지 기술을 통해 새롭게 전통 과학기술사를 서술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저자는 “경우에 따라 재치있게 대응하는 지혜”라는 뜻의 ‘기지(機智)’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과 닥나무가 ‘함께’ 종이의 역사를 만들어 왔음을 강조한다. 조선의 종이는 한반도 전역에서 잘 자라는 닥나무를 두드려 만들었는데, 특히 질기고 흰 빛깔을 자랑했다. 제지 장인들은 발로 뜬 종이를 두드리는 공정인 ‘도침(搗砧)’을 통해 밀도가 높고 윤기가 흐르며 먹의 흡수가 적당히 잘 이루어지는 최상급의 종이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책은 닥나무를 가공하는 공정과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의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가 조선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사용되고 중국과 일본에서 각광받는 수출품이 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을 벗어나 사물이 가진 힘을 전면에 드러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 이 책은 기술 노동에 종사했던 장인들과 그들의 몸에 새겨진 기술적 실행을 과학기술사의 중심에 놓는다. 닥나무와 종이의 물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장인들은 거대한 종이 물류망의 중심에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물과 밀착된 기지를 발휘하는 일에는 모든 관계를 뒤바꿀 힘”이 있었다. 장인들은 양반들이 정한 종이의 품질 기준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고, 우수한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해 높은 공임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사찰의 승려 장인들은 공물에 대한 압박이 높아지면 절을 비우고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종이를 생산해내기도 했다. 장인들이 가진 이 특별한 ‘기지’는 한번 쓴, ‘쉬는 종이’라는 뜻의 ‘휴지(休紙)’를 정부관청이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할 자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재생지 환지(還紙)로, 따뜻한 옷으로, 휴대용 그릇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닥나무와 장인, 종이가 빚어낸 풍경은 현대에도 무한히 변주되고 있다. 자원, 기술(자), 그리고 기술사물이 만들어낸 촘촘한 관계망을 잘 읽어내려면, 사물들이 내는 다양한 잡음을 들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제지 장인들이 발휘한 기지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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