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권 이상을 번역한 이한음씨는 25년차 과학전문 번역가이자 에스에프 소설가이면서 과학 저술가이다.
90년대 중반 대학을 졸업한 뒤 고시를 준비하던 그에게 연이은 낭보가 날아들었다. 지방고시(행시로 통합)에도 합격하고 신춘문예에도 당선된 것. 평소 끄적거리던 습작 실력은 ’경향신문’에 단편소설 ‘해부의 목적’이 당선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안정된 공무직으로 일할 기회도 열렸다. 그 결과, 환경직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에스에프 소설가’로서의 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공무원은 일찌감치 그만뒀고 소설가는 부업, 본업은 ‘과학전문 번역가’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번역한 책의 권수를 묻자 “10년 전에 세어봤을 때 300여권이었는데 그 뒤로는 안 세어봤다”며 “아마 400∼500권 정도 되지 않을까”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한음 번역가를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만났다.
정확한 번역 권수도 알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번역량을 자랑하는 25년차 번역가의 출발은 대학시절 절친이 막 설립된 과학전문 출판사인 사이언스북스에 입사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절친은 ‘현대의 찰스 다윈’으로 불리는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의 번역을 그에게 맡겼다. 서울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학부 때 원서를 끼고 살았던데다 신춘문예에도 합격했으니 과학책 번역가로 제격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번역도 처음인 데다 내용도 어려워서 고생을 많이 했단다. 수차례 다시 번역을 거듭한 뒤 책이 출간됐다. “덕분에 실력을 많이 쌓긴 했죠.”
당시에 과학책도 드물었지만 과학 전문 번역가는 더 드물었던 탓에 그에게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에스에프 소설가를 꿈꾸던 그에겐 과학적 배경 지식이 풍부하게 필요하던 때였다. “소설을 쓰다 보니 내가 너무 무식하다는 걸 많이 느끼게 됐고 소설의 설정을 만들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터였는데, 번역을 하면 새로운 지식이 많이 쌓이니까 계속하게 됐죠.” 상상의 세계를 탄탄히 직조하겠다는 소설가로서의 야심이 번역을 거절하지 않은 배경이다. 과학 서적이 척박한 한국 출판시장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사명감도 멈추지 않는 번역의 동력이 됐다.
새벽부터 밤까지 꼼짝 않고 1년에 15∼20권씩 번역을 했다. 케빈 켈리,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포티, 제임스 왓슨 등 저명한 과학자들의 대표작이 그의 손을 거쳐 출간됐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으로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타임머신과 과학 좀 하는 로봇’, ‘바스커빌가의 개와 추리 좀 하는 친구들’, ‘생명의 마법사 유전자’ 등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과학소설과 추리소설, 과학교양서도 다수 저술했다. 이 책들은 중국, 동남아, 멕시코까지 수출되고 있다. 최근에는 ‘세포’에 관한 책과 ‘인공지능’에 관한 책을 번역해 출판사에 넘겼고, 지금은 ‘노화와 장수’에 관한 책을 한창 번역 중이다.
그의 번역은 원작에 충실하면서 담백하고 깔끔한 번역으로 명성이 높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도 과학책은 다른 장르에 비해 문턱이 높은 편이라 번역의 질이 책 선택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이한음’이라는 역자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는 독자들이 많은 이유다. 좋은 번역에 대해 묻자 그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한편,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번역가 지망생에게는 그는 “사양 산업이니 웬만하면 딴 일을 찾으라”라고 말한다. 종일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노동집약형 업종인 데다 출판시장이 더욱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등이 고소득 전문직이라면, 번역가는 저소득 전문직”이라며 그는 웃었다. “그래도 꼭 번역하고 싶다면, 번역 작업을 토대로 배움을 많이 쌓아서 자기만의 글을 쓰라”라고 조언한다.
어린 시절 꿈이 과학자였고, 실제 과학도 출신으로 과학책을 번역하거나 집필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평생을 ‘과학’이라는 필터로 바라본 인간 세상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인간은 비합리적 존재죠.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이성적이 되어가고 비합리적 요소는 줄어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인간의 뇌는 기술발전 수준에 맞지 않게, 발전하고 있지 않죠.”
번역가로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는 과학책을 많이 보급하는 데 큰 의의를 뒀지만, 지금은 과학책보다 책 자체를 읽지 않는 걸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에게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의 비합리성과 부조리함을 합리성과 이성으로 채워나가려는 노력이다. “과학책을 많이 읽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죠.” 과학과 인문적 사유의 조화를 추구해온 번역가다운 답변이었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바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저자인 빌 브라이슨이 풍부한 유머와 재치로 쓴 우리 몸 안내서다. 피부와 시청각부터 면역계와 뇌까지 구석구석 숨겨진 비밀부터 상식을 뒤집는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로 우리 몸을 잘 사용하기 위해 알아야 할 사항들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일단 재미있다”고 추천. 빌 브라이슨 지음, 까치(2020)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가 20년에 걸친 수면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하는지, 잠이 부족할 때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불면증 등 수면 장애는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수면 의학 최전선의 대답을 들려준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책”. 매슈 워커 지음, 열린책들(2019)
지구의 정복자
사회 생물학의 창시자이자 통섭의 과학자인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 진화생물학을 토대로 인류학, 심리학, 언어학, 뇌과학 등을 종횡무진 오가며 인류 문명의 근간이 되는 도덕, 종교, 철학, 예술, 과학의 기원을 밝혀낸다. 이 번역가는 “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탐구한 책”이라고 평가. 에드워드 윌슨 지음, 사이언스북스(2013)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종양학자이자 의사가 지극히 인간적으로 서술한 암의 ‘전기’다. 자신이 직접 치료한 암 환자들의 실화를 통해 환자 입장에서 본 암의 본질과 기초 연구가 어떻게 질병의 이해로 나아가는지 설명한다. 이 번역가는 “과학책이 감동적이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울컥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가득하다”며 ‘강추’. 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까치(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