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한윤섭 지음, 홍정선 그림/창비 펴냄(2012) 올 추석에도 고향에 갔다. 40년 가까이 그 집에 살고 있는 부모님은 집이 낡는 것보다 더 빨리 늙는 것 같아 보였다. 명절 음식을 연달아 두 끼를 먹고 나니, 뭔가 다른 걸 해야겠다 싶어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근처에 신도시가 생겨나며 상가는 쇠락했고 할아버지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 이상한 고요가 감돌았다. 그래도 오래된 도시는 이야기를 지니게 마련이다. 골목과 시장을 걸어가다 보면 여기저기서 추억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오래된 마을에 가면 어디나 “옛날 옛날에” 하고 시작되는 전설이 피어나는 것이리라. 한윤섭의 <우리 동네 전설은>은 사람이 살고, 그들 사이에 이야기가 생겨나고,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가는 우리네 삶을 아이의 시선으로 포착한 동화다. 부모를 따라 득산리로 온 준영은 시골마을이 마뜩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친구도 사귈 셈이다. 하지만 득산리의 비밀을 알고 나자 그럴 수 없었다. 이 마을에는 오랜 규칙이 하나 있다. 학교에서 득산리까지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혼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마을로 가는 길 곳곳에 슬프고 무서운 전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죽을병에 걸리자 방앗간 할아버지가 약에 쓰려고 매일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일제 때 잡혀간 남자가 아카시아꽃을 따 먹고 웃으며 서 있다거나 염꾼이었던 돼지 할아버지가 상엿집에서 잠을 잔다는 둥 무시무시한 전설이다. 준영은 이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은근히 겁도 난다. 첫날 방앗간 집 문이 “키~익” 열리는 소리에 놀라 냅다 마을로 달려온 후부터 아이들과 꼭꼭 몰려다닌다. 이렇게 도시 아이가 시골 아이들과 동화되고 마을을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가 재미난 전설 속에 포개어진다. 가을이 되자 아이들은 밤 서리에 나서고 애꿎은 준영이 잡혔다. 겁이 나서 울던 준영은 돼지 할아버지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 준영이 만난 건 “죽은 사람 귀신이 붙어서 같이 산다는 할아버지, 기분 좋은 날은 꽃상여 안에서 자고 기분 나쁜 날에는 흰 상여 안에서 잔다”는 전설 속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서리를 하다 아이들이 다칠까 걱정하는 할아버지, 홀로 된 친구를 위로하며 늙어가는 득산리의 할아버지였다. 이 동화를 가로지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하나는 전설이요 또 하나는 계절의 흐름이다. 복숭아꽃이 지천으로 피어날 때 처음 득산리를 찾았던 도시 아이는 햇빛과 공기가 미묘하게 변하며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느낀다. 어제까지는 여름이고 오늘부터는 가을 하는 식으로 계절이 오고 가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순간이 있다. 자연과 가까이 사는 이들이 누리는 축복이다. 돼지 할아버지와 밤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그 아침도 그런 순간이었다. 툭, 툭, 툭!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것도 같고, 등을 치는 것도 같아 뒤를 돌아보게 하는 소리, 그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가을이 깊어진다.
한미화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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