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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무엇이 이들을 미치게 했을까?

등록 2016-02-18 20:00수정 2016-02-18 20:00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신들린 사람들의 합창
이호 엮음, 한송 펴냄(1998)

지금은 포스코로 불리는 포항제철이 들어선 자리는 해송이 짙게 우거지고 길고 고운 백사장이 펼쳐진 곳이었다. 경북 영일군 대송면의 여러 마을과 즐비한 분묘들을 옮기고 앞바다를 준설한 모래로 땅을 3~4m 돋워서 230만평의 공장터를 조성했다. 여기에 고로를 세우고 후판, 열연 공장을 지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최빈국이 땅을 판 지 5년여 만에 일관제철소를 세우겠다는 것은 당시 파견 나온 일본인 기술 고문들이 보기에 무모한 일이었다.

이때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 <신들린 사람들의 합창>이다. ‘포항제철 30년의 이야기’란 부제가 보여주듯 회사 창립 30년인 1998년에 회사가 주관해서 펴낸 책이다. 이때는 포스코가 조강생산 기준으로 세계 1위 철강회사로 발돋움한 해였다. 건설현장의 일꾼, 자금거래를 맡은 회계직원, 나중에 회장에 오르는 중간간부까지 다양한 참가자들이 쓴 수기를 엮었다.

짤막한 글 하나하나에는 기록한 이의 자부심이 물씬 묻어난다. 열악한 환경에서 악바리처럼 일을 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경험담을 풀어 놓고 있다. 열연공장을 지을 때 하루 700㎥씩 콘크리트를 타설하라는 목표가 주어진다. 밤샘을 밥 먹듯 하며 미친 사람처럼 돌진해 간다. 공사 감독을 맡았던 어떤 이는 회고한다. “담당 감독이 타설 불능이라고 판단한 것도 총감독은 무조건 타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무모하기만 할 것 같던 그러한 일들이 희한하게 타설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포철의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다를 긁어올려 터를 닦는 일을 했던 준설공사장의 소장은 “이건 건설이 아니라 모험”이라 말하는 일본인 기술자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포항제철 건설은 목숨을 건 싸움이다. 만일 포항제철소 건설 전투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저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어야 한다.”

우리가 개발연대에 이룬 업적들은 대개가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그랬기에 남들이 200년 걸린 산업화를 30~40년 만에 달성했을 것이다. 그 바탕에는 이렇게 이를 악물고 ‘전투’를 치른 사람들의 각본 없는 드라마가 있었다. 물론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역사를 영웅사관으로 쓰는 것은 사극에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신들리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지독히도 가난하던 나라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었는지 잘 모른다. 누군가의 수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 또다시 돌관작업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처럼 지치고 눈에는 살기가 돌면서도 그 지시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돌고 도는 세상을 보여주듯 포스코가 휘청대고 있다. 2010년 4조원의 이익을 내던 회사가 지난해에는 960억원 적자로 전환됐다. 창사 이래 첫 적자라고 한다. 여기에는 세계 철강경기의 침체, 중국의 추적 등 외부 여건 변화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내부의 역량 부족이 더 눈에 들어온다. 최고위 경영진에 대한 인사가 정권의 전리품처럼 취급되면서 회사의 응집력이 느슨해진 것 같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포스코가 이렇게 되고 보니 여기에 바친 선배 세대의 땀과 눈물, 그리고 성취의 기억마저 한꺼번에 풍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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