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만국기 소년/유은실 지음, 정성화 그림/창비(2007)
문학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기업에 취직해 억대 연봉을 받았을까. 아니다. 아마 마음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살았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을 테니까.
유은실 작가의 단편에는 소리 지르는 아버지, 허풍떠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큰 할머니들이 나온다. 이런 어르신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한참을 멈추어 선다. 내 아버지와 엄마와 먼저 늙어가는 선배들이 눈앞에 어른거려서다. 산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현실 속의 우리는 악다구니를 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학으로 걸어 들어간다. 작가는 여리고 슬픈 이들을 불러내어 등을 토닥여주니까.
유은실의 <만국기 소년>과 <멀쩡한 이유정>은 매력적인 단편의 세계를 열어젖힌 소중한 작품집이다. <만국기 소년> 속 ‘내 이름은 백석’은 이후 발표한 ‘새우가 없는 마을’과 묘하게 공명한다. 두 단편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지금껏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아버지의 세계를 넘어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소년의 이야기다. 작품 속 소년들은 아버지의 세계에 생긴 틈을 만난다. 성장이란 자기가 속한 세계를 의심하며 시작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작품을 읽으면 적잖이 쓸쓸해진다.
‘내 이름은 백석’은 천재시인 백석과 이름이 같은 4학년 석이의 이야기다. 시장에서 닭 집을 하는 석이 아빠는 닭대가리로 불린다. 아빠는 사람들이 만만하게 “닭대가리” 하고 불러야 닭 장사가 잘 된다며 “꼬끼오” 하고 응대한다. 석이는 이런 아빠가 ‘용머리’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4학년 담임이 “천재 시인 백석하고 이름이 똑같네”라고 말하며 문제가 생겼다. 선생님은 아빠도 백석을 좋아하는지 묻는다. 이리하여 아빠와 석이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는다. 한데 첫 구절에서‘눈이 나린다’라니, ‘눈이 내린다’가 맞는 게 아닌가. 무슨 천재 시인이 맞춤법도 모르나.
아빠는 닭을 팔아 집도 사고 차도 샀다. 그런데 백석 시인이 등장하며 한순간 초라해졌다. “나중에 아빠처럼 닭을 자르고 살아도 말이지, (…) 똑똑한 친구를 한 명은 꼭 사귀어라. 아빠는 나린다가 맞는지 내린다가 맞는지 물어볼 친구가 한 명도 없다. 내 친구들은 죄다 무식해서 말이지.”
모든 아빠가 아들에게 바란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거라.’ 그렇지만 아버지도 열심히 살았다는 건 알아주길 바란다. 그래서 아빠는 아들에게 큰소리로 “닭은 목이 길게 달려 있는 게 신선하다”고 말한다.
백석과 이름이 같다는 에피소드로 시작해 아버지로 그리고 석이의 성장으로 이야기는 끝없이 확장된다. 동화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아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웃을 수 없는 석이의 마음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초등 4학년부터.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만국기 소년/유은실 지음, 정성화 그림/창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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