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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국사회는 어떤 글로 기억되는가

등록 2018-05-14 21:28수정 2018-05-18 10:08

한겨레 창간 30돌 특별기획
책 30권으로 본 한국사회 30년

1988년 창간 이후 <한겨레>가 거쳐온 30년은 한국 사회와 문화, 지식담론이 역동했던 시기였습니다. 창간 30돌을 뜻깊게 기념하기 위해 <한겨레> 책지성팀과 대중문화팀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 변화와 문화적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책 30권과 한국영화 30편을 선정했습니다.

책 선정을 위해 학자와 평론가, 작가, 출판인 등 출판·문학계 전문가 30명을 추천위원단으로 구성해 무순위로 책 30권을 추천받았습니다. 최종 30권을 추리는 기준은 추천 빈도를 최우선으로 삼되, 10년 단위로 나눠 시기별 특징과 분야를 고루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다수의 저서가 추천 목록에 올라 책별 순위가 분산된 몇몇 저자는 이를 합산해 선정에 참고했습니다. 그렇게 추천받은 책은 모두 448권이나 됐는데 그 자체로 한국 사회 변동 30년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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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97|비문학
‘87년 체제’와 더불어 민주화·자유화·국제화 바람

1987년 6월항쟁이 막바지에 이른 6월26일 서울역 주변에서 학생과 시민 등 1만여명이 도로를 완전히 메운 채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과 맞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사흘 뒤, 집권 민정당은 국민이 요구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권 이양 등을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신군부가 쿠데타로 세운 제5공화국 시대가 저물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87년 체제’의 밑돌이 깔렸다.보도사진연감
1987년 6월항쟁이 막바지에 이른 6월26일 서울역 주변에서 학생과 시민 등 1만여명이 도로를 완전히 메운 채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과 맞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사흘 뒤, 집권 민정당은 국민이 요구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권 이양 등을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신군부가 쿠데타로 세운 제5공화국 시대가 저물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87년 체제’의 밑돌이 깔렸다.보도사진연감

1988년부터 1997년까지 10년은 나라 안팎에서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린 패러다임 전환기였다. 우리의 1988년은 2월 노태우 정부의 출범으로 시작됐다. 한 해 전인 1987년 6월항쟁의 정치적 결실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87년 체제’가 시작된 것. 서울 올림픽(1988), 국외여행 자유화(1989), 김영삼 문민정부의 과감한 개혁 조처(1993) 등이 잇따랐다. 세계적으로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미-소 양대 진영의 냉전 시대가 막을 내렸다. 한국 시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고,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도 커졌다.

20년 전인 1998년 7월,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엿볼 수있는 전남 담양 식영정에서 우리문화사랑 답사 일행이 설명을 듣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년 전인 1998년 7월,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엿볼 수있는 전남 담양 식영정에서 우리문화사랑 답사 일행이 설명을 듣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1~10권)는 1993년 봄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부제를 달고 제1권이 나오자마자 폭발적 호응을 얻으면서 사람들의 여행과 여가 활동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한겨레>의 이번 기획에서 도서 추천위원들이 추천한 총 448종의 책 중 가장 많은 추천 수를 기록했다. 전국 곳곳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과 풍부한 사진 자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곧추세우고 ‘마이카’ 시대에 답사문화 붐을 일으켰다.”(백원근·책과사회연구소 대표) 땅끝마을이 있는 해남 대흥사 계곡의 한옥 여관이 전국에서 온 손님들로 북적였고, 여관집 진돗개 ‘노랑이’는 국민 개로 유명세를 탔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물질적 풍요와 삶의 여유를 알아버린 이들에게 질 좋은 길잡이 노릇을 했다. 덕분에 그가 소개한 곳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책에서 소개된 명소들은 역설적으로 옛 정취를 잃었다”고 짚었다. 창비는 지금까지 이 시리즈의 누적 판매량이 400만권에 이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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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5·6권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꼭 10년 만에 시리즈가 완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추천 수 3위에 올랐을 만큼 중요한 책으로 꼽혔다. <한겨레> 초대 대표이사를 지낸 언론인 송건호를 비롯해, 강만길·박현채·백기완·염무웅·임헌영·최장집(가나다순) 등 모두 59명의 쟁쟁한 학자와 사상가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줄여서 ‘해전사’로 불린 이 시리즈는 “왜곡된 역사관을 가격한 20세기 후반의 의식화 교과서”(심진경·문학평론가)였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식민사관과 냉전적 한국현대사 인식의 관성을 뒤흔들어 논쟁을 불러일으킨 기념비적 작업”으로 평가했다. 2004년 한길사는 첫권 출간 25주년을 맞아 전권을 재출간했다.

냉전적 한국현대사에서 우뚝 ‘해전사’
왜곡된 역사관 깨우친 의식화 교과서
동유럽 몰락 즈음에 번역된 ‘자본론’
120년만에 연구자·대중 목마름 해소
돌아온 망명객 ‘빠리의 택시 운전사’

호킹 ‘시간의 역사’ 우주 신비 안내
‘오래된 미래’에서 대안적 삶 모색

폭발적 반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여행·여가활동 풍경 확 바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자기혁신 통한 자기계발 시대의 증표

1990년은 카를 마르크스의〈자본론〉 전 3권을 국내 학자가 완역한 판본이 동시에 2종이나 출간된 해로 기록됐다. 사회과학에서 불멸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본론>(1867~1894)이 국내 연구자들과 대중의 지적 갈증을 온전히 해소해주기까지 12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1987년부터 시작한 독일어 원본 번역 작업을 마무리한 책이 3년 만에 이론과실천사에서 나왔으며, 곧이어 비봉출판사는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2015년 타계)가 영어 및 일본어판을 우리말로 옮긴 완역본을 선보였다. 독일어 원제가 <자본-정치경제학 비판>인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와 작동 원리를 노동력의 상품화와 잉여가치 개념을 중심으로 규명하고 있다. 김연수 소설가는 “(자본론 번역·출간은) 이전 판본들까지를 포함해서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가장 중요한 출판”이라고 평가했다.

‘87년 체제’의 첫 10년은 옛것과 새것이 묘하게 뒤섞여 공존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대표작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이다. 유신 말기 남민전 사건(1979)으로 졸지에 망명객이 된 홍세화씨가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톨레랑스’라는 개념을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설파한 자전적 에세이다. 지은이가 2002년 귀국길이 열리기 전까지 이방의 거리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 조국을 그리며 길어올린 사유가 잔잔하게 심금을 울린다. 출판평론가 장동석씨는 “이 책은 민주화가 진전되었음에도 억압적인 분위기였던 1995년 당시 한국 사회의 이면들을 마주하게 했다”며 “배려와 용인을 넘어서는 포괄적 개념인 똘레랑스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지난 3월 타계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이미 이 시기에 엄청난 관심을 모은 사실이 흥미롭다. 호킹의 원저가 나온 지 2년 만인 1990년 삼성출판사에서 내놓은 번역본은 출간 2년 만에 무려 34쇄를 찍으면서 국내에서도 머잖아 대중과학서 시대가 활짝 피어날 것임을 예고했다. 당시만 해도 대중들에게는 꽤나 낯설었을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 사건의 지평선과 특이점(특이성), 중력 붕괴, 입자가속기, 물리학의 통일 등 물리학 개념들이 다수 나오는데도 독자들은 우주의 신비와 천체물리학의 아름다움에 기꺼이 빠져들었다. 오늘날 국내에서도 통칭되는 ‘블랙홀’을 ‘검은 구멍’으로 옮긴 것을 보면 마치 30년 전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이채롭다.

서구 ‘선진국’의 일로만 여겨졌던 환경 보전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1993년엔 국내 최초의 환경운동 시민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이 창립됐다. 스웨덴 생태환경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1996)는 “현대문명의 생태학적 전환을 강하게 촉구하고 각인시킨 저작”(이명원·문학평론가)으로 주목받았다. 지은이는 1970년대 인도 정부가 관광지 개발에 나서면서 히말라야 고원의 건강하고 평화롭던 마을이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분열로 고통받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삶의 가치와 방식에 대한 성찰적 대안을 제시한다. “환경, 생태의 문제의식을 사회적, 대중적으로 환기한 책인 동시에 다른 삶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 책”(서영인·문학평론가)이었다.

미국의 경영컨설턴트인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1994)은 국내에서도 얕은 처세술이 아니라 자기 혁신을 통한 전략적 자기계발 시대가 본격화했음을 알렸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 등의 권고는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받아들여졌다. 문화연구자 이원석씨는 “스티븐 코비의 작품들을 통해 소개된 ‘자기 주도성’의 개념은 사회 전반으로, 심지어 사교육 시장에까지 파고들면서 대중에게 신자유주의를 체화시킨 대표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고 짚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선정도서목록>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10(1993~), 유홍준 지음, 창비
<해방전후사의 인식>1~6(~1989), 송건호 외 58인, 한길사
<오래된 미래>(1996),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자본론> 1~3(1990), 카를 마르크스 지음, 프리드리히 엥겔스 엮음, 김수행 옮김, 비봉
<시간의 역사>(1990), 스티븐 호킹 지음, 현정준 옮김, 삼성출판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 홍세화 지음, 창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1994), 스티븐 코비 지음, 김경섭 옮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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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7|비문학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틈새선 청년·노동자의 잿빛 미래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크게 늘어났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내몰렸다. 1999년께 정부와 국제통화기금의 정리해고 방침 등에 맞서 ‘국제통화기금 책임자 처벌‘과 고용안정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  자료사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크게 늘어났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내몰렸다. 1999년께 정부와 국제통화기금의 정리해고 방침 등에 맞서 ‘국제통화기금 책임자 처벌‘과 고용안정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 자료사진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와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서, 오랫동안 독재와 냉전체제에 찌든 우리 사회의 중심축을 이전과 다르게 옮겨놓을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이 시기 동안 사회 구석구석에 민주화가 진전됐고,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닦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말 터진 외환위기의 영향력과 규정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완전히 결합했고, 경제질서의 거대한 전환 속에서 대다수가 혹독한 ‘자유시장’의 바다에 내던져졌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1998)은 ‘국가와 시장의 협력’으로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모두 극복하겠다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담은 책이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가 ‘제3의 길’을 표방했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정착, 생산적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국정지표를 내건 김대중 정부 역시 ‘제3의 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지식인 사회에서 논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1999년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오르는 등 대중으로부터도 큰 관심을 끌었다.

1998년 1월 농구선수 문경은을 비롯한 스포츠 스타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1998년 1월 농구선수 문경은을 비롯한 스포츠 스타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3의 길’은 무력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세계화, 시장개방, 구조조정을 거치며 겪게 된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굳어졌고, 뒷날 더욱 심화될 불평등의 씨앗을 뿌렸다. 이 시기 사회상을 반영하는 책은 재테크 분야의 고전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2000)이다. 세상의 변화에 맞춘 적극적인 투자만이 ‘부자 아빠’를 만든다고 설파한 이 책은 “돈과 물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전성원)했고, “투자·투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재테크의 일상화를 촉발”(장은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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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이뤄낸 민주주의는 왜 신자유주의를 막지 못했는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런 물음을 선구적으로 제기한 책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입안하기도 했던 최장집은 형식적·절차적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수준에서 실질적인 민주화를 가져다주지 못한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이 책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찢긴 한국인의 마음이 앞으로 어디를 향할지”(권보드래) 묻는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DJ정부와 대중 매료시킨 ‘제3의 길’
외환위기 맞며 현실은 정반대로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재테크 붐

절차적 민주화와 실질적 민주화 간극
‘민주화 이후이 민주주의’ 냉정한 지적
지붕 위 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
한국의 신자유주의 맹종에 경종

승자독식 체제 내몰린 청년세대
비정규직·월 88만원 체념과 분노
동양고전 신영복이 풀어낸 ‘강의’
남성 세상에 ‘페미니즘의 도전’ 짱돌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사다리 걷어차기〉(2004)는 주류 경제학과 서구 선진국들이 강요해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 폭로했다. 보호주의로 자국 산업을 성장시켜 선진국이 된 나라들이, 후진국에는 자유방임주의를 강요하는 등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과학적으로 증명한”(장은수) 이 책은 “한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맹목적인 추종에 경종을 울렸다.”(전성원) ‘장하준 열풍’은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0) 등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신자유주의의 광풍 사이에서 버림받은 대표적 존재는 노동자였다. 조선소 여성 노동자 김진숙이 쓴 <소금꽃나무>(2007)는 “1980년대 민주노조 건설 운동에서부터 2000년대 희망버스 운동으로 이어지는 (노동계급의) 역사”(천정환)를 되새기게 한다.

경제학자 우석훈과 프리랜서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88만원 세대〉(2007)에서 앞선 세대들과 달리 아무런 바리케이드도 없이 ‘승자독식’ 체제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현실에 주목했다. ‘88만원 세대’란 말은 당시 비정규직 평균임금인 119만원에서 20대가 벌어들이는 비율인 73%를 곱해서 낸 수치에서 비롯했다. 민주정부 10년의 끄트머리에 “외환위기 이후 청년의 삶을 시대적 의제로 제출”(서영인)한 이 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청년 담론’의 선구적 저작으로 꼽힌다. “한국의 20~30대 세대는 전례 없는 정치적 소외와 불안을 겪으며 성장했고 앞으로 또 그렇게 살아갈지 모른다. 그들의 분노와 체념은 21세기 한국 문화의 각 영역에서 뚜렷한 코드와 새로운 내용이 됐다.”(천정환)

한편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은 다양한 방향에서 풍성하게 제시됐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이나 수감 생활을 했던 경제학자 신영복의 옥중서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스승’의 탄생기였다.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자신의 독법으로 읽어낸 〈강의〉(2004)에서 자신의 세계를 또 한차례 크게 넓혔고, 마지막 책 <담론>(2014)으로 이를 집대성했다. “동양 고전들의 창조적 재전유를 통해 존재론적 세계관에서 관계론적 세계관으로의 변환을 역설하는, 생애의 사유를 집대성하여 이를 하나의 토착사상의 경지로까지 밀어올린”(김명인) 저작이다. 옛 소련 출신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티코노프 블라디미르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을 펴냈다. “외국 출신 연구자가 한국 사회의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좌파적 시각에서 쓴 날카로운 평론”(백영서)은 “불편하지만 객관의 렌즈로 우리를 보게 하는 귀한 창”(백원근)이었다. <디아스포라의 눈>(2006)을 비롯해 “경계인의 관점에서 한반도 전체와 동아시아 및 세계를 비평하는”(백영서)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의 저작들 역시 이 시기 우리 사회가 얻은 귀중한 지적 자산이었다.

90년대 초 본격화된 페미니즘 담론은 대중적인 언어, 일상의 언어로 우리 사회를 파고들었다. 여성학자·평화학자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2005)은 대표적 저작이다. “남성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이뤄진 이 세계에 통렬하면서도 흥미로운 문제 제기”(심진경)를 한 이 책은, “현학적이지 않으며 실천적인 페미니즘 대중교양서이자 사회비평서란 점에서 페미니즘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전성원) 오늘날 과학 담론과 과학책의 폭발적인 인기도 이 시기에 터를 닦았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99)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2004),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2002)와 <만들어진 신>(2007),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2005) 등 쟁쟁한 과학 고전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쏟아져나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선정도서 목록>

<제3의 길>(1998) 앤서니 기든스 지음, 한상진 외 옮김, 생각의 나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2000) 로버트 기요사키 지음, 형선호 옮김, 황금가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 최장집 지음, 후마니타스
<사다리 걷어차기>(2004) 장하준 지음, 부키
<88만원 세대>(2007) 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강의>(2004) 신영복 지음, 돌베개
<페미니즘의 도전>(2005) 정희진 지음,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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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17|비문학
깊어진 불의의 시대, 국가와 정의를 다시 묻다

10차 범국민행동의날 촛불 집회가 열린 2016년 12월3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이 ‘송박영신’을 의미하는 행사에 참석해 세월호를 의미하는 종이배를 접어 놓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10차 범국민행동의날 촛불 집회가 열린 2016년 12월3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이 ‘송박영신’을 의미하는 행사에 참석해 세월호를 의미하는 종이배를 접어 놓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거치며 깊어진 불평등 속에서 책들은 정의를 물었다.

1991년 민음사에서 나왔다가 길출판사에서 2009년에 다시 번역된 칼 폴라니의〈거대한 전환〉(1944)은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관련해 중요성이 재조명된 책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국을 재편한 신자유주의 이념이 10년 만에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국을 맞았다. 금융자본들이 나서서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시장은 정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수록 제대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던 신자유주의 이론이 실패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이 책에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두면 시장이 스스로 알아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균형에 이른다는 ‘자기조정 시장’ 이론이 상상 속의 허구임을 역사적 근거를 통해 논증한다. ‘자기조정 시장’ 또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으로, 국가의 시장 개입 여부가 아니라 국가가 시장의 파괴적 힘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을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를 따져 물은 폴라니의 이 책은 마치 최근에 출판된 책처럼 현실을 직격했다.

이 기간에 출간된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선정위원들이 꼽은 책은 단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010)였다. 200만부 이상 판매된 데는 ‘하버드대 명강의’라는 이름값도 한몫했지만, 제목 또한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2010년 이 책이 국내에 출간될 당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반격의 공세를 취한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 정책들과 4대강 공사 강행, 깊어지는 소득 양극화 등으로 정치적 무력감을 느낀 시민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일으킨 것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정의와 공정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한국 사회에 강력한 경고장을 날린 책. 연속된 대선 패배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세상에서 이 책은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탐구를 촉발했다”고 말했다. 이원석 문화연구자는 같은 해에 나온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까지 들며 “위 두 권 모두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 책들이 정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한국의 불의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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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10년 만에 파국 맞자
다시 펴든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글로벌 부유세 걷자는 ‘21세기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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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앞세운 유발 하라리 연작
AI 시대, 인간의 삶과 미래 탐구

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2014)은 한국에서도 하나의 ‘현상’을 낳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이 책에서 피케티는 지난 300년간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각해져 다시 ‘세습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 통계자료와 수식으로 입증하며, 이를 막기 위해선 ‘글로벌 부유세’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원석 문화연구자는 “한국의 헬조선 담론은 세습자본주의의 대중 버전이다. <88만원 세대>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던 희망의 불씨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암울한 현실 앞에서 대중은 <21세기 자본>을 구매하고, 헬조선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벌였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의 베스트셀러들에서 개인이 자기계발의 주체이자 ‘마이카’로 여행을 다니는 중산층으로 등장했다면, 2010년대의 책 속에서 개인은 고삐 풀린 자본의 전횡과 상속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 탓에 고통받는 ‘헬조선의 시민’으로 나타났다. 2010년 출간된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아프니까 청춘이다〉는 특히 제목으로 논란이 됐다. 세계·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불평등과 취업난으로 고통받는 젊은이들에게 그 고통을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걸로 비친 책 제목은 여러 방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동시에 김 교수는 자기계발 강사처럼 청년들을 다그치는 게 아니라 위로하고 격려하며 조언을 건네는 법륜, 혜민, 김제동 등과 함께 청춘 ‘멘토’로 불리며, 멘토 현상의 대표자로 호명되기도 했다. 2012년 출간된 한병철의 <피로사회>도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새것을 생산하라고 요구하며 사람들을 탈진과 우울증에 빠지게 만드는 현시대의 병리를 철학으로 분석해 호응을 얻었다. 최규석 작가는 만화 <송곳>(2017)에서 기업의 부당함에 저항할 길을 찾는 개인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들어나가고 힘겹게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내 각광을 받았다.

책은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을 기록하고 희생자를 애도하고 국가의 무책임·무능력에 분노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김애란, 박민규 등 작가들이 세월호에 관해 쓴 글을 모은 〈눈먼 자들의 국가〉(2014)는 “가공된 허구의 세계를 넘어서서 문학이 독자와 당사자적 공감과 유대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 세월호 시대 한국문학의 존재증명과도 같은 책”(서영인 문학평론가)이었다. 이외에도 <금요일엔 돌아오렴> <세월호, 그날의 기록>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외면하고 회피했다> 등 세월호 관련 도서들이 많은 선정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30년 못지않게 앞으로 30년은 인류사가 거대한 전환점을 돌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디지털 신기술, 바이오 기술의 발전 등으로 인간의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측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상황에 맞춰 출판계에서도 과학·기술 도서 출간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새로운 저자들도 발굴되고 있다.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산업혁명>(2016), <맥스 테그마크의 라이프 3.0>(2017) 등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고 이로 인해 발생할 윤리적, 사회적 문제들을 진단하는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범준, 김상욱, 이정모, 이종필, 장대익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대중과학서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얇았던 국내 과학 저자군도 한층 풍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2015), <호모 데우스>(2017) 연작은 빅히스토리를 통해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그를 기반으로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내다본 책들의 대표격으로 단연 주목받았다. 지난달까지 국내에서만 각각 50만부, 25만부가 팔렸다. 장은수 대표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스스로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힘까지 획득한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고 이 책을 선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선정도서목록>

<정의란 무엇인가>(2010)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와이즈베리
<21세기 자본>(2014)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눈먼 자들의 국가>(2014) 김애란 박민규 외 지음, 문학동네
<아프니까 청춘이다>(2010) 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거대한 전환>(2009)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길
<사피엔스>(2015)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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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2017|문학
분단·이념 금기에 맞서고, 외면받던 개인· 내면 그려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은 80년대 변혁운동의 좌절과 침잠을 상징했다. 90년대 문학은 그로 인한 상실감과 환멸에서부터 출발했다. 연합뉴스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은 80년대 변혁운동의 좌절과 침잠을 상징했다. 90년대 문학은 그로 인한 상실감과 환멸에서부터 출발했다. 연합뉴스

정권 교체와 민주화의 염원을 날려버린 1987년 대통령 선거,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한 무렵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한국 사회에서 변혁의 열기를 급격히 가라앉혔다. 그에 따른 성찰과 모색, 또는 더 나쁘게는 환멸과 냉소가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를 파고든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였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을 바꾼 한국어판 제목부터가 시의적절했다. 1968년을 정점으로 한 일본 학생운동의 퇴조와 몰락이 드리운 비관과 냉소의 정조는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1989년과 그에 이어진 90년대 청춘의 내면 풍경에 맞춘 듯 조응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지적한바 “혁명도, 혁명의 가능성도 사라진 일본 단카이 세대(1947~49년에 태어난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풍요롭지만 탈정치적 탈사회적 일상 세계와 내면 풍경을 그린” 이 소설은 “급진 변혁운동이 쇠퇴하고 대중소비사회로 진입한 90년대 한국 사회”의 열렬한 사랑을 받음은 물론 작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루키적 정조와 태도 그리고 문화 및 생활 취향은 90년대 한국 사회와 문학 작품에서 확고한 청춘의 표징으로 자리잡았다. “부정할 수 없는, 한 시대·세대의 정서와 태도의 원본”이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 조선대 교수의 표현대로였다.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를 두고 황지우 시인은 “이념의 대홍수 이후 그것의 범람에 가담했던 세대의 기록”이라 했고, 문학평론가 이명원 경희대 교수는 “1980년대에 대한 청산주의와 환멸”을 거기에서 읽어냈다. 관점은 다르지만 이 시집이 1980년대라는 ‘불의 연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에는 두 사람 다 동의하는 셈이다.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이 진부해졌다/ 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랑이 진부해졌다”(‘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라는 구절은 공동체의 좌절과 개인적 환멸이 포개질 때의 일그러진 내면 풍경을 선언적으로 요약한다.

이념과 체제를 둘러싼 거대 담론이 일단 좌절을 겪고 물러선 자리에 ‘개인’과 ‘내면’이 들어섰다. 경제적 모순과 계급투쟁 또는 민족 모순과 분단 문제라는 ‘커다란 중심’의 전일적 지배가 외면했거나 소홀히 했던 가치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여성의 목소리였다. 공지영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변화된 목소리를 가장 인상적으로 들려주었다. 작가 자신과 같은 80년대 학번 여성 셋을 주인공 삼은 이 소설은 특히 남녀평등을 이론적으로는 학습했지만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한 여성(과 남성)들의 실패담이자 각성 및 갱신의 다짐을 담아 사회적 파장을 낳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1993년 이후 김인숙, 은희경, 전경린 등 여성 작가들의 페미니즘 소설이 90년대 한국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공지영 자신은 장편 <고등어>와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로 90년대 후일담 문학을 선도하는 한편,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겨냥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장애인학교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한 <도가니>, 그리고 쌍용자동차 집단 해고 문제를 다룬 르포 <의자놀이> 같은 작품을 통해 시급한 사회적 현안에 적극 대응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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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염원 날린 87대선 비집고
환멸·냉소로 파고든 ‘상실의 시대’
공안 당국에 시달렸던 ‘태백산맥’
분단현실 극복에 힘 보탰던 ‘손님’
남성적 서사 전형 보인 ‘칼의 노래’

일그러진 내면 그린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여성의 목소리 상징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80년대 가치 내면 승화한 ‘외딴 방’
‘소년이 온다’ 5·18은 진행형 웅변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과 신경숙의 두번째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는 90년대적 문학 정신의 표본을 시와 소설 양쪽에서 보여주었다. 두 책은 변혁의 열정이 시들해진 뒤 내면의 섬세한 무늬와 풍경을 챙기는 ‘90년대 문학’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들이 80년대의 정치적 억압과 그에서 비롯된 비애를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처럼, 신경숙 소설의 내면 역시 “80년대적인 것이 남긴 거대한 기억이고 그림자”(김명인)라 할 수 있었다. 신경숙이 ‘내면’으로 승화시킨 80년대적인 것의 가치는 장편 〈외딴 방〉(1995)에서 노동 현실과 글쓰기의 길항 및 화해로 표출되었다. 그 뒤 신경숙은 장편 <엄마를 부탁해>로 미국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맨아시아문학상을 수상했지만, 2015년 표절 논란이 일면서 타격을 입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1983년에 연재를 시작해 1989년에 전 10권으로 완간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완간 이후에도 오래도록 공안 당국의 사법처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 이념 대립과 물리적 충돌을 내재적 관점에서 서술한 이 소설은 한국 사회의 이념적 금기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수백만 독자의 응원에 힘입어, 그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황석영은 1989년 북한 방문 이후 국외 망명과 5년의 옥살이로 10년여의 공백을 거친 뒤 2000년 장편 <오래된 정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반성은 있으되 전망이 부족했던 90년대 후일담 문학의 심원한 극복”(신형철)으로 평가된 이 소설에 이어 이듬해 내놓은 장편 〈손님〉은 “분단 현실의 비극을 투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해원과 상생의 과정을 민중서사 형식을 통해 새롭게 포착”(문학평론가 백지연)했다는 평을 듣는다. 분단과 이념 대립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태백산맥>과 궤를 같이하지만, 오구굿이라는 민간신앙 및 전통 서사를 틀거리로 삼음으로써 세계사적 주제와 민족적 형식의 모범적 결합을 보여주었다.

황석영과 다른 맥락에서 남성적 서사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 〈칼의 노래〉(2001)의 김훈이었다. 건조한 단문 위주에다 사실의 뼈대만을 추리는 김훈의 문장은 여성적 감수성이 지배해온 ‘문단 소설’에 거리를 둔 채 2000년대 소설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현의 노래>와 <남한산성> <흑산>으로 이어진 그의 일련의 역사소설 역시 ‘현대적’ 역사물의 유행을 이끌었다.

5·18 광주의 아픔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2014)는 “완료될 수 없는 광주의 비극을 개별적 고통과 치욕, 회한의 감각으로 재현”(문학평론가 서영인)함으로써 “광주는 언제나 지금 여기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소설가 김연수) 영국 작가 조앤 롤링의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1999~2007)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출판과 판매 기록을 갱신하다시피 했다. 한국에서도 1999년 제1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모두 1460만부가 팔렸다. 이 작품은 또 영화로 각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게임과 캐릭터 상품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21세기 문화 콘텐츠의 공식을 보여주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선정도서목록>

<상실의 시대>(198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최영미 지음, 창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 공지영 지음, 해냄
<입 속의 검은 잎>(1989) 기형도 지음, 문학과지성사
<외딴 방>(1995) 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태백산맥>1~10(1983~1989), 조정래, 해냄
<손님>(2001) 황석영 지음, 창비
<칼의 노래>(2001) 김훈 지음, 문학동네
<소년이 온다>(2014) 한강 지음, 창비
<해리포터> 시리즈(1999~2007) 조앤 K. 롤링 지음, 김혜원 옮김, 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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