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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등록 2018-10-14 10:46수정 2019-03-18 10:46

[토요판] 기획
철학자 김진영이 이 세상을 다녀가는 법

철학아카데미 전 대표 김진영
8월20일 타계 뒤 유고집 출간
‘투병 일기’의 형식을 띠지만
그의 몸과 마음·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과 성찰의 기록

휴대폰 메모장에 짧은 문장 적고
섬망에 빠져들어 사흘 뒤 사망
평생 고전 텍스트 강의해온 그가
생의 끝에 자신을 텍스트 삼아
읽고 쓴 ‘마지막 공부’의 결과물
▶8월20일 세상을 떠난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가 출간됐다. 자신의 글에 엄격했던 그는 번역서 한 권 외엔 책을 내지 않았다. 제자들이 설득해 그의 글로 채워진 단 한 권의 책을 묶었으나 살았을 때 손에 들진 못했다. 그의 글은 단정하고 깊고 맑았다.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을 제목에 담은 책은 ‘투병 일기’이면서 그가 이생을 떠날 때까지 사력을 다한 공부의 기록이다. 그는 병상에서 거듭 썼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사진이 서재 책상 의자에 놓여 있다. 책상 옆엔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가 있다. 김명하 제공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사진이 서재 책상 의자에 놓여 있다. 책상 옆엔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가 있다. 김명하 제공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렀다.

10월10일 오전 피아노 소리가 여느 때처럼 그의 서재(서울 중랑구 양원역로 자택)를 깨웠다. 그가 듣던 아들(김명하·24)의 피아노 연주가 서재 창을 지나 베란다로 넘어갔다. 베란다 창밖 저편에선 그가 보던 불암산이 맑은 하늘 아래 청량했다. 한적한 도로 옆에서 그가 보던 270번 파란 버스가 정차해 쉬고 있었다.

그 풍경이 그의 아침이었다.

아내(김주영·57)가 아들의 피아노 공부를 위해 꾸민 연습실이 아들의 진로가 바뀐 뒤부터 그의 서재가 됐다. 매일 아침 아들이 서재에서 피아노를 치면 그는 서재에 붙은 베란다로 건너가 고장 난 세탁기 위에 앉았다. 전자레인지, 쌀포대, 생활용품으로 비좁은 베란다에서 아들의 피아노를 들으며 담배를 피웠다. 창문 너머 파란 버스(투병 중엔 ‘희망 버스’라고 부름)를 바라보며 쓸 글을 생각했다. 아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악과 세상이 피워 올리는 소리가 산을 타고 내려온 바람에 섞여 그의 아침을 이뤘다.

10월5일 저녁 아들이 120여명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청암홀)했다. 피아노 앞엔 악보 대신 책이 있었다. <아침의 피아노>. 그가 있던 풍경이 그가 없는 출판기념회에 놓인 한 권의 책 제목이 됐다. 그 아침과 그 피아노가 책의 첫 글이 되어 그가 이 세계를 떠나며 남긴 글들을 이끌었다.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피아노에 응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틀렸다. 피아노는 사랑이다. 피아노에게 응답해야 하는 것, 그것도 사랑뿐이다.”

지난 10월5일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열린 <아침의 피아노> 출판기념회에서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아들 김명하씨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그가 매일 아침 피아노를 치는 풍경이 책의 제목이 됐다. 이해수 제공
지난 10월5일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열린 <아침의 피아노> 출판기념회에서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아들 김명하씨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그가 매일 아침 피아노를 치는 풍경이 책의 제목이 됐다. 이해수 제공
그가 없는 풍경

김진영(66).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과 아도르노·벤야민의 철학·미학을 공부했다. 소설·사진·음악 등을 재료로 자본주의의 빛과 어둠과 환영을 읽어냈다. 비판정신의 부재가 부당한 권력들을 지탱한다고 믿으며 글을 쓰고 강의했다. 2016년 7월부터 <한겨레>에 칼럼 ‘김진영, 낯선 기억들’을 연재했다. 그의 글은 단정하고 깊고 맑았다. 이론으로 세상을 투사하면서도 삶 위에 이론을 두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삶을 통과했을 때만 글이 됐다. 지난 8월20일 간암으로 타계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철학아카데미 대표를 지냈다.

2017년 7월16일 김진영은 아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명하야, 아빠가 매일을 기록한다. 그 글들을 너에게 보내니 읽고 간직하렴.”

얼굴빛이 안 좋다는 제자들의 말에 건강검진을 받은 그는 암이 의심된다는 진단(2017년 6월30일)을 받았다. 정밀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불안과 희망, 단상과 사유를 오가는 짧은 글들을 써나갔다. <아침의 피아노>는 암선고를 받은 지난해 7월부터 사망 사흘 전까지 쓴 글들이다. “환자의 삶”이 시작된 뒤 남은 힘을 모아 스마트폰 메모장에 조금씩 썼다. ‘투병기’ 형식을 띠지만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의 기록”이다. 그의 글들은 평생 세상의 텍스트들을 읽어온 학자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텍스트 삼아 읽고 쓴 ‘마지막 공부’의 결과물이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떠난다는 것과 남겨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과 더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바르트와 천상병을 만나 글로 맺혔다. 확진 검사를 위해 입원(7월21일)하러 가는 차 안에서 그는 아들에게 메일로 보낸 글을 다시 읽어줬다. 사흘 뒤 그는 ‘간암 4기 환자’가 됐고 1년 뒤 그 글은 <아침의 피아노> 첫 장에 실렸다.

“그동안 이어지던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되었다.”(작가의 말)

그가 “상상하지 않았던 삶”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2017년 7월)

한 사람의 일상은 가장 깨기 어려운 것이면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는 “때아니게 툭툭 꺽”(2017년 7월)이는 마음과 겨뤘다. 부러지는 마음으로 그는 일상을 지키려 분투했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2017년 8월)

그는 아픈 사람만의 감각으로 ‘환자의 주체성’을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몸속의 타자가 있다. 환자는 그 타자가 먼저 눈을 뜨고 깨어난 사람이다. 먼저 깨어난 그 눈으로 생 속의 더 많고 깊은 것을 보고 읽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환자의 주체성이다.”(2017년 8월)

“나는 기록으로 맞선다”

김진영은 세 차례 색전술을 받았지만 항암 치료는 하지 않았다. 망가진 몸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삶의 자긍과 존엄을 지킬 수 있길 바랐다. 가족도 그의 뜻을 따라줬다. “아빠가 견딜 수 없는 치료는 내가 막아드리겠다”고 아들은 약속했다. 그가 투병 일기를 쓸 때 아내는 날마다 간병 일지를 기록하며 그를 살폈다. 아빠와 남편이 떠났을 때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 가족이 그를 지키고 보내는 방법이었다.

장 천공을 겪으며 김진영의 몸은 43㎏이 돼 있었다. “병원 복도를 걸어가면 해골 표본이라도 보는 듯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그때마다 그는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모든 것이 걷는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걷는다. 보행이 생이다. 나는 이 보행의 권위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2018년 7월)

그는 글로 숨 쉬었고 글로 병과 싸웠다. 그는 암선고를 받고 사망하기까지 13개월 동안 삶을 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예전처럼 글을 썼고 그 글을 쓰느라 사력을 다했다. 그가 ‘이 세상을 다녀가는 방법’은 마지막까지 쓰는 것이었다.

“나는 기록으로 맞선다.”(2017년 7월)

철학과 고전을 강의해온 김진영은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다만 글 쓰는 사람이고 싶어 했다. 그는 소설가를 꿈꿨다. 철학을 공부한 것도 소설을 쓰기 위해서(아내 김주영)였다.

그에게 쓰는 일은 밥 먹고 숨 쉬는 일과도 같았다.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는 끊임없이 썼다. <아침의 피아노>도 늘 하던 글쓰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남겨질 이들을 위한 글이 됐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2018년 7월)

김진영은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 뒤 쓴 <애도 일기>를 번역했다. <아침의 피아노>의 부제는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였다. 애도는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의식이었다. 그의 애도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다 하지 못한 사랑을 향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글과 강의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도 ‘사랑’이었다.

“나와 운명 사이에서 해야 할 일들 (…)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2017년 12월)

지난 2월 그는 제자들과 작은 강의를 시작했다. 암선고 뒤 외출을 자제하는 그가 투병 의지를 갖길 바라며 제자들이 모임을 청했다. 그는 “어차피 할 거면 강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10~20명의 제자들이 격주로 그의 집 근처에 모이면 그는 강의하고 밥 먹고 차 마시며 종일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했다.

“이젠 내 이야기를 하겠다.”

그가 투병하며 쓴 글들을 가져와 제자들과 읽었다. 서구 사상과 문학을 강의해온 그가 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이 겪고, 살고, 앓은 일들을 말했다. 그는 그 이야기들을 ‘육체 텍스트’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강의를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렸고 그를 설득해 글의 출간을 추진했다. 책 내길 거절하던 그도 분량을 채우기 위해 새 글을 써 보탰다. 종양이 커진 지난 7월초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그는 시인 천상병을 생각했다.

“천상병은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라고. 이번 <한겨레> 칼럼은 천상병에 대해 썼다. 어느 정도 만족.”(2018년 6월)

그가 만족한 칼럼이 게재(6월29일치 ‘프루스트와 천상병’)된 지 한 달만에 그는 서울대병원에 재입원(7월30일)했다.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문서에 그는 서명했다. 그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자 제자들의 마음도 급해졌다. 출판사 접촉(7월)과 계약(8월8일)이 빠르게 진행됐으나 그의 건강은 더 빨리 악화됐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8월17일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서울의료원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겼다. 밤 9시15분 그는 제자 차경희(사진작가)와 통화했다. 마감을 앞둔 칼럼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는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2016년 박근혜 정부 당시 만든 칼럼 폴더명은 ‘난세록’)을 미리 써뒀다.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있을 때면 여러 편의 원고를 써서 가족에게 읽어줬다. 의견을 들은 뒤 수정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칼럼을 더는 직접 챙길 수 없게 됐을 때 원고 파일을 제자에게 맡겼다.

밤 9시40분께 딸(김이원·26)에게 휴대전화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메모장을 열고 썼다.

“화해. 다투지 않기. (…) 건너가기, 넘어가기, 부드럽게 여유 있게. 내 마음은 편안하다. (…) 가고 오고 또 가고. (…) 잘 보살피기. 적요한 상태.”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한겨레> 칼럼을 시작하며 웃음 없는 사진을 썼다. 그가 사망한 뒤 실린 칼럼에선 그의 바람을 따라 같은 자세의 웃는 얼굴로 바꿨다. 그는 웃는 얼굴로 이 세상에 기억되길 바랐다. 차경희 제공
김진영 전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한겨레> 칼럼을 시작하며 웃음 없는 사진을 썼다. 그가 사망한 뒤 실린 칼럼에선 그의 바람을 따라 같은 자세의 웃는 얼굴로 바꿨다. 그는 웃는 얼굴로 이 세상에 기억되길 바랐다. 차경희 제공
그가 남긴 <아침의 피아노>의 마지막 글(책에선 ‘내 마음은 편안하다’는 문장을 최종 문장으로 편집)이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까지 그가 한 행위는 글쓰기였다. 문장을 맺은 직후 그는 섬망에 빠져들었다. 사흘 뒤 숨을 거뒀다.

장례를 마친 아들 명하가 아버지의 서재와 노트북에서 원고 더미를 찾아냈다. 처음 보는 글들이 뭉치로 나왔다. 큰딸 이원이 태어나던 해(1993년)부터 14년간 쓴 글(‘이원아 명하야’)도 있었다. 그 글 안에서 이원은 마당에서 세발자전거를 탔고, 명하는 그림책을 보며 피아노를 쳤다. 딸과 아들 모르게 아빠는 그들이 성장하는 시간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쓴 글 묶음(‘주영에게’)도 나왔다. ‘편지’란 제목의 단편소설과 아버지를 소재로 쓴 미완성 장편소설도 빛바랜 종이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이길 바랐다.

“(<한겨레> 칼럼) 표제 앞에 붙은 프로필 사진을 본다. 턱을 괴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는 옆모습. 그런데 나는 거의 똑같은 포즈의 사진을 또 한 장 갖고 있다. 지금처럼 진지한 얼굴이 아니라 은근하게 웃고 있는 얼굴. 칼럼을 시작하면서 첫 사진을 프로필로 선택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웃고 있는 표정의 사진을 택했으리라.”(2017년 7월)

그가 남긴 칼럼이 그의 이름으로 계속 나왔다. 사망 나흘 뒤, 섬망 직전 부탁한 칼럼(‘부드러운 악’)이 신문에 실렸다. 사진도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차경희 “웃는 얼굴로 기억되길 바라신 것 같다”)로 바뀌었다. 신문사로 전달된 원고들 중 선별된 그의 마지막 칼럼은 10월19일 지면(이날까지 사후 3편)에 오른다.

그가 만져보지 못한 책이 49재(10월8일)를 앞두고 출간돼 그의 수목장 나무(경기 양주) 앞에 놓였다. 지난 4월 쓴 글이 묘비에 새겨졌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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