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 조산리로부터 약 4㎞ 정도 떨어져 있는 섬이다. 조선 세종 때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해 6진을 개척한 이래 토성을 쌓고 목책을 두른 조선의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병사를 제외하고 농민은 섬에 거주할 수 없었고, 춘경추수기에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우리에게는 1587년 여진족의 습격을 미리 방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녹둔도는 어느 나라 영토일까?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정식수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제210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올해는 “러시아·몽골과 수교 30주년 되는 해로 북방국가들과의 협력증진이 집중되는 신북방정책을 본격 추진하는 ‘신북방 협력의 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의 만남이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남은 피를 불렀고, 서로의 관계가 안정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조선과 러시아의 첫 만남도 그러했다.
16세기 말 모피를 얻기 위해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정복을 단행했던 러시아는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 전장에서 마주했다. 조선은 그들이 러시아 병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사격술이 뛰어난 병사들이 조선 사람이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청의 요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병사를 파병해야만 했던 두 차례의 ‘나선정벌’이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계속되었고, 청과 국경선을 획정하는 네르친스크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청이 서구 열강과 최초로 맺은 근대적 국제조약이자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마지막 조약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무력을 사용해 청의 방대한 영토인 연해주를 병합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청 대표의 신변을 위협해 가며 아이훈과 톈진 조약, 그리고 1860년 베이징 추가조약을 맺었다. 베이징 추가조약의 결과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고유 영토였던 녹둔도가 하루아침에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한반도가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획기적 사건이었지만, 그 결과가 우리에게 유익했던 것은 아니었다. 철종 11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조선은 청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고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1889년(고종 26)에야 비로소 청에 항의하며,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1984년 11월 북한과 소련 당국자 사이에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었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우리 정부 역시 지난 1990년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느덧 팔순을 넘긴 국제정치학계의 원로 김용구 선생이 펴낸 <러시아의 만주‧한반도 정책사, 17~19세기>는 노학자가 평생을 두고 연구한 19세기 한국 외교사 5부작의 최종판으로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각으로 한반도-만주-러시아,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에 집중한 책이다.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길은 서구가 명명한 ‘실크로드’만 있는 것이 아니며, 최근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가 반드시 한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지난해 대한민국 외교부는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슬로건을 공모하였는데, 최우수작으로는 ‘우정과 신뢰로 함께 빚는 미래’가 선정되었다. 우정과 신뢰 그리고 미래란 좋은 말이지만, 그리로 가는 길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길을 닦아야만 한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