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 1887) 1, 2
호세 리살 지음, 김동엽 옮김/눌민(2015)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그 소유권을 두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계속해서 갈등을 빚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황으로 알려진 알렉산데르 6세(Papa Alessandro VI)가 칙서를 반포해 세계를 동과 서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나눠줬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한 차례 말한 적 있다. 이후 동쪽으로 간 포르투갈과 달리 서쪽으로 간 스페인은 태평양과 맞닿은 멕시코 아카풀코(당시 이름은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신대륙의 은을 갤리언 선박에 싣고 마닐라에 도착해 중국의 비단과 일본의 도자기를 유럽에 가져다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거뒀다. 오늘날 필리핀(Philippines)이란 나라 이름은 이 땅을 식민지로 삼았던(1571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Philip Ⅱ)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호세 리살은 300년 가까이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오던 1861년, 필리핀 루손섬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 유학해 의학을 공부하는 한편, 스페인의 가혹한 식민지배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 활동에 참여했다. 학업과 여러 활동으로 바쁜 가운데에도 그는 스페인과 예수회 신부들이 필리핀 사람들을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미지로 왜곡하여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에 크게 분개하여 짬짬이 소설을 썼다. 이것이 1887년 발표한 그의 첫 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였다.
이 책은 오랜 세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스스로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우치지 못하던 스페인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일깨워주었고, 서구인들에게 필리핀의 가혹한 식민 지배 현실을 고발하는 책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필리핀의 식민지 현실을 고민하던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되어 이후 필리핀 혁명과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그를 불온한 인물로 판단해 필리핀으로 추방하였다. 1892년 귀국한 호세 리살은 마닐라를 중심으로 교육과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필리핀민족동맹을 조직하고, 스페인 지주들에게 소출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소작농의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다시 체포되어 다피탄섬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책에서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1896년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 카티푸난을 결성해 혁명을 기도했다. 유배 중이었기에 혁명 사건과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그는 변호사조차 없는 엉터리 재판을 거쳐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해 12월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호세 리살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스페인 병사들이 같은 필리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같은 동포의 손에 죽는 장면을 차마 볼 수 없다며 뒤돌아 선 채 총살당했다. 리살의 처형 이후 스페인은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필리핀을 떠나야만 했지만, 그 이후 필리핀에는 미국이 다시 들어와 식민지로 삼았다.
아시아 민족주의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종종 망각하곤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1896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민족주의 혁명을 일으켰고, 1901년까지 유지된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수립했으며 리살이 처형당한 지 50년 되던 해인 1946년 서구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최초의 아시아인들이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호세 리살은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라는 시를 남겼다.
<황해문화> 편집장
호세 리살.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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