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권오신 지음/문학과지성사(2000)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인가 아닌가를 두고 최근까지도 논쟁이 있지만, 영국 출신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책 <콜로서스>를 통해 “미국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항상 제국”이었다며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0년 권오신(강원대 사학과 교수)이 펴낸 <미국의 제국주의: 필리핀인들의 시련과 저항>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는 계기가 된 미서전쟁(1898)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이 독립하는 1946년까지의 역사를 미국의 제국주의 식민정책과 필리핀 민중의 저항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살피고 있다. 구한말 청의 외교관 황준헌은 미국이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국가’라며 조선에 ‘연미’(連美)할 것을 권했지만, 미국은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이래 항상 해외 영토에 대해 관심을 품고 있었다.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눈독을 들이던 미국은 중국 무역과 세력 팽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필리핀에도 특별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카리브 해의 쿠바와 태평양의 필리핀은 미국의 원대한 계획 중 일부였으며 미서전쟁은 일거양득을 가능케 해주었다. 필리핀은 이미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여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벌여왔다. 호세 리잘의 처형 이후 무장봉기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한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스페인과 개전하기 전 아기날도를 귀국시켜 필리핀 혁명군의 협력을 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오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에 환희에 차 있었고, 미국을 자유와 독립의 후원자로 여겼다. 그러나 종전 과정에서 미국은 필리핀 혁명정부와 위장평화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식민 지배를 위한 병력을 비밀리에 증파했다. 마침내 병력이 충분히 증원되었다고 판단되자 미국은 필리핀 혁명정부와 전쟁을 벌였다. 미서전쟁은 불과 4개월 만에 종료되었지만, 필리핀 혁명군의 저항은 3년 2개월 12일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발랑기가 전투에서 패배한 미국의 스미스 장군은 그 지역의 모든 남자와 10살 이하의 소년, 소녀 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우리도 잘 아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장군은 포로 숫자에 비해 어째서 그토록 많은 필리핀인이 사살되었는가 묻자 자신의 병사들이 ‘과녁 맞히기 연습’을 효율적으로 훈련한 것이라고 답했다.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한 미국의 전술은 한마디로 ‘대량학살’이었다. 일찍이 고종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로 믿고 여러 차례 도움을 청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친한파 미국인이자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호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했다. 헐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는 “당신은 왜 패할 나라를 지지하려 하는가. 스스로를 위해 단 한 번의 일격도 가할 수 없는 나라를 위해 미국이 헛되이 개입할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국은 그보다 한 달 전인 7월 27일 도쿄에서 필리핀(미국)과 한반도(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인정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뒤였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1월 17일 마침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당시 조선 주재 미국공사였던 에드윈 모건은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에게 축하인사를 남기고 가장 먼저 조선 땅을 떠난 외교관이 되었다. 헐버트는 “미국은 작별인사도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가장 먼저 조선을 버렸다”고 기록했다. 미국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꿈꿨던 필리핀의 희망과 영토 욕심 없는 국가의 지원을 바랐던 고종의 짝사랑은 결국 망국(亡國)으로 이어졌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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