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랑스의 6·25 참전 노병들에게 주프랑스한국대사관에서 마스크를 선물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니, 두 권의 책이 떠올랐다. 하나는 중학생 무렵 구립도서관에서 읽었던, 프랑스 종군기자 겸 작가 에드완 베르고가 쓴 <6·25 전란의 프랑스대대>(동아일보사, 1983)란 책이고, 다른 한 권은 보응웬지압 장군이 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독립전쟁) 회고록 <디엔비엔푸>(길찾기, 2019)였다. 서구 근대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는 조선 이외에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등 여러 지역, 여러 민족 들이 있었지만, 조선의 상황은 이들 나라와 크게 달랐다. 이들이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서구(백인종)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했던 반면 조선은 같은 동양 국가인 일본(황인종)에 의해 지배를 당했다. 그런 까닭에 전후를 받아들이는 감각 역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이 그야말로 ‘해방’이었다면, 이들 아시아의 다른 민족에게는 승전국이 된 식민지종주국들의 귀환, 즉 ‘재점령’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1945년 9월2일,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라는 미국 독립 선언서를 차용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베트남이 완전한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46년 11월 하이퐁 폭격으로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초기만 하더라도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프랑스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하이퐁에서만 8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다음 달엔 수도 하노이를 점령했다. 프랑스는 전쟁 초기부터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초반 승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선은 교착되었고, 1949년 중국 혁명 승리 이후 1950년부터 베트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1950년 7월, 일곱 번째 참전국으로 6·25전쟁에 파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미처 극복하지 못했고,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등 식민지 상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파병 결정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프랑스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으며 전후 재편되는 세계 질서 속에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식민지전쟁에서 미국의 전쟁비용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기에 해군 구축함 한 척과 대대 병력 규모의 지상군을 파병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를 비롯해 뛰어난 전과와 용맹을 과시했다. 인명피해도 컸지만 프랑스군은 전쟁 기간 동안 전장관찰을 위한 특별 참모진을 파견해 현대전과 미군의 전술교리를 익혔고, 다수의 최신 무기체계와 전투 장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1953년 10월 한반도를 떠나 프랑스의 또 다른 전쟁터인 인도차이나반도로 향했다. 우리에겐 구원군이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 그들은 무엇이었을까? 탈식민의 역사에서 ‘이념’이란 유럽의 ‘30년 전쟁’에서 ‘신·구교’를 찾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일지 모른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