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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기억과 역사는 공정한가

등록 2020-08-14 13:24수정 2020-08-14 13:29

[책&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베트남과 전쟁의 기억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부희령 옮김/더봄(2019)

비엣 타인 응우옌은 1971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응우옌의 부모는 전쟁에서 패배한 남베트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 보트피플이 되어 해상을 떠돌다 미국에 정착했다. 부모가 난민캠프에 있는 동안 그는 미국인 위탁 가정에 맡겨졌고, 미국 문화와 언어를 습득하면서 자랐다. 훗날 그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소설 <동조자>를 펴내 2016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책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의 첫 구절에서 응우옌은 “나는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자랐다. 나는 미국이 저지른 짓에 실망했지만 미국의 변명을 믿고 싶어 하는 베트남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 같은 경험과 입장을 지닌 한 작가가 전쟁과 기억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소설로 미처 다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녹여낸 탁월한 에세이이자 문화비평서다.

누구나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 자본주의는 이런 상처조차 상품으로 만들 수 있으며 실제로 기억을 판매하며 역사를 이용하는 총체적 기억산업이 존재한다. “기억의 산업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전쟁의 산업화와 나란히 진행”되기 마련이고, “전쟁 무기의 화력”은 “기억의 화력”과 일치한다. 모든 전쟁 혹은 분쟁의 패자들은 무시되고, 지워지고, 삭제된다. 심지어 미국에 패배를 안긴 베트남전쟁조차 할리우드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기억(관련)산업’은 이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미국이 영원히 결백한 나라라는 상상의 기억을 제공한다.

기억과 역사는 공정한가? ‘상처를 치유하는 기념비’란 평가를 받은 마야 린의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비엔 5만 8000여명의 전몰자 명단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 추모비의 길이는 137미터에 이른다. 사진작가 필립 존스 그리피스는 “같은 간격으로 베트남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비슷한 추모비를 만든다면, 아마도 15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라며 이 기념비가 침묵하고 있는 또 다른 희생자들에 대해 말했다. 한국전쟁 동안 한국인 300만 명이 죽었지만 미국/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었다. 이 말은 한국전쟁에 대한 그들의 기억이 공정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 아니 손에 피를 묻힌 자들, 다시 말해 강자들은 어떤 전쟁도, 어떤 살인도 공정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이를 공정하게 기억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응우옌은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말한다. 베트남 1A 고속도로에서 호이안을 향해 가며 다낭을 막 지나친 직후 갈라져 나오는 샛길에는 ‘하미(Ha My) 학살 희생자 위령탑’이 서 있다. 이 추모비는 지난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기부한 돈으로 세운 것으로 1968년 1월24일(음력)에 죽은, 살해당한 13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추모비에서 가장 나이 많은 희생자는 1880년에 태어난 여성이고, 가장 나이 어린 세 명의 희생자는 1968년에 죽었다고만 적혀 있다. 어쩌면 미처 태어나지 못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에는 ‘보 자인(Vō Danh)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명(無名)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추모비는 누가 이들을 죽였는지 말하지 못한다. 침묵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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