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리멤버 홍콩: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전명윤 지음/사계절(2021)
‘이걸 알면 당신도 아재’란 놀이가 있다. 과거 유행했던 문화나 사물, 인물을 보여주고 그중 몇 가지를 아느냐에 따라 옛 추억을 환기시키는 놀이다. 영화 <넘버3>의 대사를 차용해보면 “예전에 김찬삼이란 분이 계셨어. 김찬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에 혼자서 온 세계를 돌아다닌 분이지.” 이 이름을 알고 있다면, 아마 당신도 아재일 가능성이 높다.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대중에게 세계여행의 꿈을 심어준 책이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세계여행은 더 이상 희소한 경험이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이었던 2018년 한 해에만 2870만 명이 해외를 다녀왔다.
그런 시대, 김찬삼을 대신해 여행 좀 다닌다는 사람들에게 ‘환타’ 전명윤은 일종의 전설이자 구루(영적 스승)였다. 학교 제자를 비롯해 함께 일하는 후배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와 전화 통화도 가능한 사이라는 걸 부러워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환타(幻打)란 덧이름은 여행에 대한 ‘환상을 깬다’는 뜻이다. 오늘날 여행이란 반짝거리는 볼거리로 치장된 포르노그라피화한 관광상품이 되었다. 환타는 그런 여행에 대한 환상, 여행구원론의 환상을 깨고 세상 어느 곳이든 먹고사는 일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그야말로 유물론적인 여행가였다. 전명윤에게 여행이란, 타락한 세계에서 먹고사는 일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삶의 형식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유물론적인 여행가가 지난 14년간 수없이 들락거리며 애정한 장소인 홍콩은 근대 아시아의 역사와 상처가 농축된 장소였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치며 근대의 경로를 밟았고, 중국으로 귀환한 이후에는 일국양제의 실험장이자 새로운 천하체제를 꿈꾸는 중국몽이 전시되는 쇼윈도였다.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 일어나는 일들, 실험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관심사였다. 알다시피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는 행정장관 직선제 선출을 요구하며 벌어진 우산혁명을 비롯해, 송환법 반대시위 등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런 시점에서 전명윤이 펴낸 <리멤버 홍콩>은 시의적절한 읽을거리다.
간혹 접착제를 붙여놓은 듯 읽다보면 내려놓기 어려운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중반에 해당하는 제6장 ‘우산혁명’에 이르기까지 나 역시 환타 특유의 너스레 섞인 상식과 날카로운 통찰에 감탄하며 읽었고, 참다못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환타는 그답지 않은 담담한 어조로 “6장부터 장르가 달라져요. 뒤로 가면 슬퍼지실 거예요”라고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란 걸 입증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책에는 투쟁 현장에서 그가 홍콩 젊은이들과 나눈 대화들이 있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이긴 거예요?” “우리도 항상 이긴 건 아니야. 늘 졌고 계속 지는데도 지치지 않고 싸워서 결국 이긴 거야.” “그럼, 우리도 계속 싸워야 해요? 곧 경찰이 온다는데…. 여길 지켜야 해요?” “아니야, 도망가. 경찰이 보이면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지금 진다고 해도 너희들이 지치지 않으면 언젠가 이기는 날이 올 거야.” 글을 읽는데 자꾸만 목이 메었다.
<리멤버 홍콩>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밸런타인데이에 자기 애인을 살해한 파렴치한 범죄인 한 명의 송환을 둘러싸고 벌어진 작은 불씨 하나가 어떻게 ‘홍콩-중국’이란 광야를 불태우는 일대 사건으로 전화해가게 되었는지, 어째서 홍콩이 그처럼 인화성 가득한 공간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복잡한 심사와 사연을 어찌 몇 줄의 글로 전할 수 있으랴.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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