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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언젠가 중년 될 ‘영페미’에게 “긴 인생, 함께 멀리 가요”

등록 2021-07-10 19:44수정 2021-07-10 20:56

[토요판] 기획
40대에 다시 만난 페미들

20대 시절 여성주의 열혈 활동가들
생각하던 바 일상에서 확장한 모습
수의사, 사업가, 가수, 병원경영 등

역사의 순간 담아 기뻤던 제작과정
“당장 되지 않아도 좌절 말자”
거센 백래시도 사회 진보의 증거
1990년대 영페미니스트의 활동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오늘도 매일매일> 손경화 촬영감독(왼쪽부터), 강유가람 영화감독, 남순아 구성작가가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990년대 영페미니스트의 활동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오늘도 매일매일> 손경화 촬영감독(왼쪽부터), 강유가람 영화감독, 남순아 구성작가가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 40대가 되어 젊은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만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은 전국 곳곳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살고 있었다. 수의사, 농산물 꾸러미 사업가, 병원 경영, 인디 뮤지션 등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일상에서 확장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담긴 다큐멘터리 <오늘도 매일매일>이 지난달 30일 극장에 내걸렸다. 여성주의 스토리텔링에서 독보적이라는 평을 듣는 영화감독 강유가람의 신작 제작 과정을 제작진에게 들어봤다.

“영화에서처럼 1990년대에는 남학생들이 여대 축제에 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전통처럼 이어졌어요. 얼굴도 가리지 않고 부끄러운 줄도 몰랐던 시대였죠. 지금 온라인에서 숨어서 하는 백래시(저항)는 더 강렬해지긴 했지만 어찌 보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강유가람)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더 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뭔가 내려놔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페미니즘이 확실히 위협이 될 만큼 힘이 세졌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항이 심하게 오는 것인데, 백래시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저 페미니즘이 교양으로만 여겨지던 때보다는 진일보했다고 생각해요.”(손경화)

1990년대 말 여성주의 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40대가 된 감독이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이 지난달 30일 개봉했다. 남성들이 많이 방문하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누리꾼들 사이에서 이른바 ‘좌표’가 찍혔다. 누리꾼들은 다큐를 소개한 온라인 플랫폼에 가서 별점 테러를 하거나 악성 리뷰를 달았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런 백래시를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홍역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 한 카페에서 <우리는 매일매일>을 발표한 강유가람 감독을 만났다. 작품을 같이 만든 손경화 촬영감독, 남순아 구성작가도 함께했다. 이들은 지난 2년간의 제작 과정을 떠올리며 울고 웃었다. 약 7년 전 이 작품을 기획한 강유 감독은 2019년 연출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작품을 개봉할 수 있었다. 지난해 영화계가 코로나19를 겪은 탓에 현 배급사인 인디스토리를 만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이다.

매력 넘치는 40대 페미들

<모래>, <이태원>, <시국페미> 등 여성주의 관점의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온 강유가람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올해 만 마흔둘이 된 감독에게 미투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의문이 찾아온다. 20대 때 여성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는 그때보다 폭넓은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기를 맞이했지만, 많은 혼란과 갈등 가운데 놓여 있다. 감독은 40대가 된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답을 찾아 나선다. 그는 “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녹여야 했던 영화 초반 10분을 만드는 일이 제작 과정 중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전국 곳곳에서 제각각의 모습으로 잘 살고 있었다. 그동안 소소한 연락은 이어왔지만 서로의 상황을 잘 알진 못했다. 다시 만난 이들은 여전히 여성주의 감수성을 지닌 채 인생에서 저변을 확장해나간 모습이었다. 수의사가 되어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키라’(활동명)는 사회운동과 거리가 먼 삶을 택한 것 같았지만 터를 잡은 지역에서 소싸움 반대 운동을 하며 동물권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페미니즘 문화제를 열며 20대 때 활발히 운동하던 ‘짜투리’는 가정을 이루고 제주도로 이사해 농산물 꾸러미 사업을 한다. 지역사회에서 여성운동을 이어가며 종종 아들과 집회에도 나간다. 여성주의적 병원을 만들고 싶었던 활동가 ‘어라’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창립하고 지금은 경영고문으로 일한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된 ‘오매’는 여전히 여성운동의 최전선에서 살아간다. 대학 시절 총여학생회에서 반성폭력 학칙을 만들던 ‘흐른’은 청소년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무대에서 노래하는 인디 뮤지션으로 살고 있다. ‘여성주의 플러스알파’로 살고 있는 ‘40대 언니들’의 모습이다.

지난 3일 ‘씨지브이(CGV) 라이브러리톡’에서 강유가람 감독이 관객들과 함께 대화하고 있다. 인디스토리 제공
지난 3일 ‘씨지브이(CGV) 라이브러리톡’에서 강유가람 감독이 관객들과 함께 대화하고 있다. 인디스토리 제공

강유 감독은 작품을 만들면서 이 다섯 인물이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어떻게 담을 때 이들이 가장 매력적일까를 놓고 제작진과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하는 말이 교조적으로 들리기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었죠.” 강유 감독은 처음 이 작품의 제목을 <꼴페미 전성시대>라고 짓고 기획안을 썼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페미니스트의 평범성을 조명하는 이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을 찾다 보니 개봉을 앞두고 현 제목으로 변화했다.

“20대 때 여성주의 활동가 경험을 한 평범한 40대들이 삶에 어떻게 여성주의를 확장했는지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사람이 평생 동안 매일 성폭력 뉴스를 보면서 세상과 맞서 싸울 순 없잖아요. 페미와 페미 아닌 삶, 두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확장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남순아 구성작가)

“이제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상당한 규모가 생겼고, 책을 찾아 읽고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확실한 위로가 되고 함께 멀리 가자는 작품을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였어요.”(손경화 촬영감독)

촬영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손경화(39·필명 김유원) 촬영감독은 장편소설 <계투>로 올봄 제26회 한겨레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대본과 스토리를 탄탄하게 만든 남순아(30) 구성작가는 고교 때부터 영화 일을 해왔고, 이번 작품에 ‘영페미’의 감각을 녹이는 데 힘을 실었다. 지금은 삶의 한 방식이 된 것들이 1990년대에는 여성주의 운동의 소재였다. 90년대 20대 활동가들은 대학에서 성희롱이 담긴 게임을 하지 말자는 규칙을 만들고, 비혼 문화축제나 월경 페스티벌 등 문화행사를 처음 기획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인 백래시가 최근 몇년 사이 강해졌다고 하지만 사실 90년대에도 있었다. 영화에는 고려대 남학생들이 이화여대 축제에 가 난동을 부리다 이대 학생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담겼다. 지금은 온라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숨어서 이뤄지는 일들이 당시엔 당당히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이뤄졌다. 군 가산점제 폐지, 호주제 폐지처럼 90년대 시대 상황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이 되어 지금 볼 수 있듯, 최근 사회 현안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제작진은 행운으로 여겼다. “예전 자료 영상을 보면 기록이 이렇게 소중하구나 싶은데, 우리가 그런 역사의 순간들을 기록했을 때 무척 기뻤죠. 2019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위력성폭력 사건에서 1심을 뒤집고 실형이 선고된 2심 판결에 기뻐하던 모습,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순간 헌법재판소 앞에서 환호하던 순간들을 담았을 때 무척 기뻤죠.”(손경화)

일상에서 확장하는 삶

지금의 40대 페미니스트들이 한때 20대 영페미였던 것처럼, 작품을 보는 지금의 10대와 20대 영페미들도 언젠가 중년이 될 것이다. 강유가람 감독은 “인생 생각보다 길다”는 이야기를 다시 강조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딸의 여권을 흔쾌히 내주며 10대 주인공을 섬에서 탈출시킨 이정은 배우의 대사이기도 하다. 강유 감독은 “인생이 정말 생각보다 길더군요. 너무 강박적으로 살지 말고 편하게 마음 먹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당장 뭐가 안 바뀐다고 좌절하지 말자는 뜻”이라고 했다. 이 말은 결국 다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28살 때 이 작품에 합류한 남순아 구성작가가 말했다. “20대 땐 40대가 된 나를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막연히 ‘나중에 나이가 들겠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40대가 되면 이런 식의 활동들을 할 수 있구나, 삶이 지속되는구나, 이 영화를 통해 느끼게 됐어요. 인생은 길기 때문에 다양한 영역에서 계속 페미니즘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자리에 모인 1970년대생 강유가람 감독, 1980년대생 손경화 촬영감독, 1990년대생 남순아 구성작가는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함께 멀리 같이 가자”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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